Ra Mắt Hay Ra Đi Raw - C554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54화
냉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빗발쳤다.
청려가 도움말을 호출하는 소리다.
-프로필.
-타이밍 놓치지 말고.
동시에 눈앞의 실물 청려가 커피를 내민 자세 그대로 약간 머쓱한 듯이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음, 커피를 안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잘못 가져왔을까요?”
“아닙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데뷔도 못 한 사람을 묻어버리려고.
애초에 배우 데뷔의 푸른 꿈도 없긴 했다만, 이 새끼의 의도가 보여서 이빨 나갈 뻔했다.
나는 정중히 손을 뻗어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유명한 분을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봬서 긴장했습니다. 커피,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음료일 뿐인데요. 저야말로 과찬 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네요. 하하.”
청려가 살짝 위트를 섞어 부드럽게 말을 더했다.
“저보다 연상이신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하세요.”
-도움말.
이중인격이 따로 없네, X발.
지이잉-
이 와중에 내 의자 위 스마트폰에서도 진동이 울렸다. 슬슬 주단도 촬영이 끝났는지 궁금해서 연락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김래빈이 복도 전방 2m 거리에서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다.
달려든 차유진을 말리고 있긴 하나, VTIC까지 등장하니 말을 걸어볼까 말까 번뇌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데뷔 초에 VTIC의 작곡 방식을 알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었던가…?
“건우 씨?”
-프로필.
‘잠깐.’
눈알이 돌아갈 것 같다. 환장하겠네.
나는 미간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리고 다소 회복은 됐다만, 여전히 물먹은 솜 같은 몸 상태로 최대한 출력을 내서 두뇌를 굴리려 들었다. 여느 때처럼 계산 빡세게 해서 최적화된 답안을 내놓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갱신되는 팝업에 눈을 드는 순간.
새로운 누군가가 글귀로 등장했다.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님께서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빠르고 간결하고 친절하게.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당신에게 자신의 방식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특성 : 평정심]
그리고 모든 것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 * *
-두근.
심박수가 부드럽게 느슨해진다.
-두근….
이제 세상은 고요하다.
알겠다. 정보가 많을수록 변수가 많고, 변수는 혼란을 만든다.
그리고 혼란은 잡음이다.
나는 내가 잡음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근…….
하지만 순서를 알고 있다면.
모든 것을 올바른 위치에 맞춰 넣을 수 있다면, 그곳은 한 점의 튐 없이 고요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고요의 세상을 체험하는 중이다.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어.’
일의 우선순위는 이미 머릿속에 정렬되어 있다.
첫 번째.
-차유진, 김래빈과 반드시 대화할 이유는 없다.
놓자.
나는 그냥 과거의 이 녀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반갑기도 했고.
그래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기에,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아.”
“Cooool.”
내가 적당히 웃으며 눈인사만 하고 보내도 상관없는 일이다.
정 대화하고 싶다면 기회는 또 찾아오겠지.
나는 어린 김래빈이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차유진을 끌고 자신들의 스탭들을 쫓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차유진은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Seeya!”
그리고 다음 정렬.
주단.
-주단은 자리에 없다.
메시지는 시간을 두고 답장해도 되니 고려할 것이 아니다.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하자.
그렇게 순식간에 정렬이 끝나고 나면.
어느새 세상엔 간결한 요소만 남는 것이다.
-청려와 도움말.
이것도 알맞은 위치로 보내자.
다시 근본적인 문장이 머릿속에 기준선을 세운다.
-내가 청려의 도움말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이유.
녀석이 모르는 정보를 선점하는 것은 내 손패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상대보다 많은 것을 알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한 상태다. 그걸 잘 써먹으면서 생존했으니까.
그러나 익숙함을 접어두면… 올바른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려가 내게 적개심을 가질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다.
나중에 예기치 못한 사태로 내 배우 신분이 밝혀져서 또 도움말을 삭제하니 마니 하면서 변수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은 시기에 타이밍이 왔을 때 공개하는 편이 낫다.
그래. 여기가 올바른 위치였다.
-두근.
화이트 노이즈처럼 울리던 심장 소리는 여전히 안정적이다.
그렇게 나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제 프로필은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알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녀석을 관찰했다.
청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도움말을 호출하던 녀석의 부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스탭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지만, 소음이 넘치는 환경상 소리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야.]
나는 웃으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네 도움말, 나다.”
청려의 얼굴에서 표정이 없어졌다.
명중이었다.
* * *
청려는 당장 정색한 채 자리를 뜨거나 도움말 삭제를 갈기진 않았다.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부드럽게 대며 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설명을 들어야겠는데.”
놀랍진 않았다.
‘이 녀석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니 파악하려고 들겠지.’
나도 녀석에게 굳이 숨기지 않고, 놈이 도움말인 날 삭제한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갑자기 생긴 몸과 혼란, 그리고 LeTi로부터 배우 일감을 받기까지.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흐뭇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는 것 같은 평정심은 그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흠, 약간 아쉽군.
하지만 그 자리를 힘이 대체했다.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당신을 후원했습니다! : 에너지 +]
‘이거지.’
이제 욕 나오는 통증은 없다.
묵직한 피로감은 여전하다만, 그래도 뇌가 수액이라도 맞은 것처럼 팽팽 돌아간다.
‘이게 나지.’
나는 피가 도는 머리로 쾌적하게 대화에 집중했다.
“사실 처음엔 열 받아서 너한테 말 안 한 건 맞다만, 이렇게 만나기까지 한 마당이니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
“뭐. 네가 삭제했더니 뜬금없이 몸이 생겼다고 하면 또 무슨 의심을 받을까 싶기도 했고.”
청려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괬다.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왜 배우가 되려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목표로 한 건 아닌데. 그냥 너희 회사 사람이 명함을 주더라고.”
“…….”
“돈도 없고 신분도 없으니까 내가 인간답게 살 방법 하나는 마련해 놔야지.”
“소속사와 계약할 때도 신분은 필요했을 텐데.”
“과거의 내 신상을 빌려 쓰고 있다. 좀 어리긴 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별문제는 없을 거야. 어차피 이 상태도 임시라서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프로필까지 찍었으니, 예명을 만들자고 소속사를 설득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애초에 말이다.
“이건 아마 네가 도움말을 삭제하면서 벌어진 부작용 같으니까. 오래 갈 상태는 아니겠지.”
“…….”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지금 대학에 재학 중인 류건우의 프로필을 보여주는 걸로 설명을 끝냈다.
누가 봐도 저 녀석이 나이를 덜 먹은 내 모습이라는 건 뻔히 보일 것이다.
‘차라리 증명하기 편하군.’
도움말일 때보다 실물 증거가 있어서 낫다.
게다가 여기서 청려 이놈이 류건우에 대해서 알아봤자 일개 데이터 팔이 녀석에게 뭘 하겠는가.
나는 깔끔하게 선언했다.
“이걸로 내가 아는 건 다 설명했다.”
배팅 끝.
청려는 팔짱을 낀 채로 잠깐 말이 없어졌다.
나는 녀석을 가만히 주시했다.
혹시라도 갑자기 이놈이 도움말 삭제 팝업에서 또 ‘예’를 누르려고 하면 당장 주먹으로 놈의 명치를 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롭게 대화를 재개하는 거지.’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놈이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꺼내긴 했지만.
“예명을 써야겠는데.”
“…?”
이놈 지금 뭐라는 거냐.
“배우를 계속하려면 신분을 쭉 도용해야 하겠지. 발각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본명을 감추는 방향으로… 음, 이 시기의 내 소속사는 그런 이미지를 선호할 테니, 괜찮겠어.”
“무슨 소리냐.”
“음? 건우 씨. 배우로 성공해야죠.”
청려가 빙긋 웃었다.
“잘 해봐요. 응원할 테니까.”
마치 호의를 베풀 듯이.
‘이 새끼 봐라.’
내가 데뷔 때부터 이 패턴을 한두 번 겪는 것 같냐.
나는 머리에 벼락을 맞듯이 이놈의 사고 매커니즘을 깨달았다.
이득!
이놈은 재시작 전에 최대한 다음 삶에 유용할 정보를 긁어가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배우로 활동하면서, 그쪽 업계 정보라도 알아 와라?”
“이해가 빠르네.”
청려 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현장에서 내가 요구하는 정보를 최대한 자세히 알아 와. 지인이 없으니 쓸데없이 활동 중에 구설수에 휘말리진 않겠지.”
“…….”
“흠. 도움말보다 그쪽이 더 유용할 수도 있겠는데.”
이 새끼 자기 혼자 앞서가는 거 봐라.
“내가 왜.”
내 물음에, 청려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간단한 물물교환이지. 나는 네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너는 내게 정보를 주고.”
흠.
“그리고 하나 더.”
청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보를 얻어야 하니, 네가 그 일을 할 동안은 내가 재시작하지 않겠지.”
“…!”
이걸 거는군.
나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분명히 말했다. 네가 재시작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청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로 상관없는 건 아닐 텐데.”
“…….”
“적어도 위험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 단지 그걸 무시할 정도로 화가 났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위험이라는 걸 표출하고 싶었던 거겠고.”
청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데.”
“…….”
“올해 11월까지. 무조건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또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은?”
청려가 웃었다.
“그러지 않겠지만,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네게 손해는 없어. 애초부터 배우는 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정보는 그 과정에서 저절로 알게 될 테고… 나와 공유한다고 네게 달리지는 건 없지.”
“달라지는 건 네가 내 활동을 지원하는 것뿐이다?”
“정확해. 그리고 그건 네게 확실한 이득일 텐데.”
“…….”
나는 빠르게 계산했다.
그리고 결국 인정했다.
내가 논리적으로 이 새끼랑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누구도 손해 안 보는 협업이긴 하군.’
이 새끼 말투 때문에 꼴 받긴 했지만 말이다.
‘정보원으로 사람 쥐어짤 거면서 혓바닥만 길어서는.’
다단계 피라미드가 고수익 보장한다며 입 터는 거랑 똑같다. 분명 슬슬 간 보다가 결국 선 넘게 정보를 요구하게 되겠지.
‘그때 기싸움 들어갈 걸 염두에 두자고.’
다만 내가 이 과정을 뻔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내게 유리하다.
게다가 하나 더.
‘이놈과 쓸데없이 틀어지는 것보단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여러모로 편해.’
아까 내 정체를 솔직히 이야기할 때부터 생각했지 않은가. 리셋증후군을 자극하지 말자.
이 스탠스의 연장 선상에서 보자면, 압도적으로 추가 기울긴 한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배우로 활동하실 건가요, 건우 씨?”
상상도 못 한 일이다만.
오냐.
“프로필도 찍었으니 그래 보죠.”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청려는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틀었다.
뭐, 좋다.
“그럼 저도 청려 씨에게 손해 없는 이야기 하나만 하고 싶은데요.”
“흠?”
“의식주는 네가 보장해라.”
정보원 복지 좀.
이왕 이렇게 된 거 뜯을 건 뜯자.
“…어렵지 않지.”
딜.
나는 운전석에 앉은 녀석과 악수했다.
잠시 후.
드르르륵-
“회사?”
“집주인.”
대기실에서 짐을 챙기던 나는 드디어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찾아 주단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비상! 타겟 접근 중.
-회피가 안전하지만 과감히 접촉해도 의외의 성과가 날 수도 있죠.
-형?
-흠, 벌써 상황은 종료됐겠군요…
아무래도 청려가 여기 들린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연락을 계속 시도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진 못했다만, 그래도 애쓰긴 했군.
‘특이한 놈인데 할 때는 또 기특한 면도 있단 말이지.’
나는 주단에게 보낼 답장을 타이핑 했다.
-타겟 접촉 완료.
-정보 교환 중.
그렇게 됐다.
그리고 나는 약간 고민하다가, 피식 웃으며 메시지를 덧붙였다.
-정보 값으로 오피스텔 받음.
너 이런 거 좋아할 거 안다.
예상대로, 곧 스마트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JSA.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도트 박문대를 들여다보던 건장한 성인 무리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문대(ㅁvㅁ) : 회복된 체력에 기뻐하는 중!]
이제 박문대의 체력 막대기는 눈에 띌 정도로 길어졌으며, 노란색이었다.
“절반은 왔어요.”
“그 말은…?”
“네.”
큰달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두세 번만 더 하면, 형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목적지가 바로 목전이었다. 사람들이 각자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박문대 (ㅁㅅ//) : 배우로 인생 설계 당하는 중…….]
“……??”
“또 뭔데.”
“문대 형 새로운 꿈 꿔요? 배세진 형이 줬어요?”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청려는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촬영장을 벗어나 이동 중인 듯한 박문대의 배경으로 짧게 교통수단이 지나갔다.
선팅된 차량의 안.
‘…….’
그는 단번에 그 내부를 알아보았다.
과거, 자신이 자주 사용하던 회사 법인 명의 차량 내부였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박문대는, 과거의 자신을 만났다.
그것도 상대의 차량에 탑승할 정도로 연관된 상태.
청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54화
냉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빗발쳤다.
청려가 도움말을 호출하는 소리다.
-프로필.
-타이밍 놓치지 말고.
동시에 눈앞의 실물 청려가 커피를 내민 자세 그대로 약간 머쓱한 듯이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음, 커피를 안 좋아하시나 봐요. 제가 잘못 가져왔을까요?”
“아닙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데뷔도 못 한 사람을 묻어버리려고.
애초에 배우 데뷔의 푸른 꿈도 없긴 했다만, 이 새끼의 의도가 보여서 이빨 나갈 뻔했다.
나는 정중히 손을 뻗어서 커피를 받아들었다.
“유명한 분을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봬서 긴장했습니다. 커피, 정말 감사합니다.”
“그냥 음료일 뿐인데요. 저야말로 과찬 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네요. 하하.”
청려가 살짝 위트를 섞어 부드럽게 말을 더했다.
“저보다 연상이신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하세요.”
-도움말.
이중인격이 따로 없네, X발.
지이잉-
이 와중에 내 의자 위 스마트폰에서도 진동이 울렸다. 슬슬 주단도 촬영이 끝났는지 궁금해서 연락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직까지도 김래빈이 복도 전방 2m 거리에서 힐끔힐끔 이쪽을 보고 있다.
달려든 차유진을 말리고 있긴 하나, VTIC까지 등장하니 말을 걸어볼까 말까 번뇌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데뷔 초에 VTIC의 작곡 방식을 알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었던가…?
“건우 씨?”
-프로필.
‘잠깐.’
눈알이 돌아갈 것 같다. 환장하겠네.
나는 미간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리고 다소 회복은 됐다만, 여전히 물먹은 솜 같은 몸 상태로 최대한 출력을 내서 두뇌를 굴리려 들었다. 여느 때처럼 계산 빡세게 해서 최적화된 답안을 내놓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갱신되는 팝업에 눈을 드는 순간.
새로운 누군가가 글귀로 등장했다.
빠르고 간결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모든 것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 * *
-두근.
심박수가 부드럽게 느슨해진다.
-두근….
이제 세상은 고요하다.
알겠다. 정보가 많을수록 변수가 많고, 변수는 혼란을 만든다.
그리고 혼란은 잡음이다.
나는 내가 잡음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근…….
하지만 순서를 알고 있다면.
모든 것을 올바른 위치에 맞춰 넣을 수 있다면, 그곳은 한 점의 튐 없이 고요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고요의 세상을 체험하는 중이다.
‘모든 것에 제자리가 있어.’
일의 우선순위는 이미 머릿속에 정렬되어 있다.
첫 번째.
-차유진, 김래빈과 반드시 대화할 이유는 없다.
놓자.
나는 그냥 과거의 이 녀석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다.
…반갑기도 했고.
그래서 대화를 해보고 싶었기에,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아.”
“Cooool.”
내가 적당히 웃으며 눈인사만 하고 보내도 상관없는 일이다.
정 대화하고 싶다면 기회는 또 찾아오겠지.
나는 어린 김래빈이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며, 차유진을 끌고 자신들의 스탭들을 쫓아가는 것을 확인했다.
차유진은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Seeya!”
그리고 다음 정렬.
주단.
-주단은 자리에 없다.
메시지는 시간을 두고 답장해도 되니 고려할 것이 아니다.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하자.
그렇게 순식간에 정렬이 끝나고 나면.
어느새 세상엔 간결한 요소만 남는 것이다.
-청려와 도움말.
이것도 알맞은 위치로 보내자.
다시 근본적인 문장이 머릿속에 기준선을 세운다.
-내가 청려의 도움말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이유.
녀석이 모르는 정보를 선점하는 것은 내 손패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상대보다 많은 것을 알아 이용하는 것에 익숙한 상태다. 그걸 잘 써먹으면서 생존했으니까.
그러나 익숙함을 접어두면… 올바른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려가 내게 적개심을 가질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다.
나중에 예기치 못한 사태로 내 배우 신분이 밝혀져서 또 도움말을 삭제하니 마니 하면서 변수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은 시기에 타이밍이 왔을 때 공개하는 편이 낫다.
그래. 여기가 올바른 위치였다.
-두근.
화이트 노이즈처럼 울리던 심장 소리는 여전히 안정적이다.
그렇게 나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제 프로필은 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알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녀석을 관찰했다.
청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도움말을 호출하던 녀석의 부름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스탭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지만, 소음이 넘치는 환경상 소리는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웃으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네 도움말, 나다.”
청려의 얼굴에서 표정이 없어졌다.
명중이었다.
* * *
청려는 당장 정색한 채 자리를 뜨거나 도움말 삭제를 갈기진 않았다.
대신 주변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부드럽게 대며 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설명을 들어야겠는데.”
놀랍진 않았다.
‘이 녀석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니 파악하려고 들겠지.’
나도 녀석에게 굳이 숨기지 않고, 놈이 도움말인 날 삭제한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갑자기 생긴 몸과 혼란, 그리고 LeTi로부터 배우 일감을 받기까지.
사람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는 것 같은 평정심은 그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흠, 약간 아쉽군.
하지만 그 자리를 힘이 대체했다.
‘이거지.’
이제 욕 나오는 통증은 없다.
묵직한 피로감은 여전하다만, 그래도 뇌가 수액이라도 맞은 것처럼 팽팽 돌아간다.
‘이게 나지.’
나는 피가 도는 머리로 쾌적하게 대화에 집중했다.
“사실 처음엔 열 받아서 너한테 말 안 한 건 맞다만, 이렇게 만나기까지 한 마당이니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
“뭐. 네가 삭제했더니 뜬금없이 몸이 생겼다고 하면 또 무슨 의심을 받을까 싶기도 했고.”
청려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괬다.
그리고 잠시 후.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왜 배우가 되려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목표로 한 건 아닌데. 그냥 너희 회사 사람이 명함을 주더라고.”
“…….”
“돈도 없고 신분도 없으니까 내가 인간답게 살 방법 하나는 마련해 놔야지.”
“소속사와 계약할 때도 신분은 필요했을 텐데.”
“과거의 내 신상을 빌려 쓰고 있다. 좀 어리긴 하지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별문제는 없을 거야. 어차피 이 상태도 임시라서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프로필까지 찍었으니, 예명을 만들자고 소속사를 설득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애초에 말이다.
“이건 아마 네가 도움말을 삭제하면서 벌어진 부작용 같으니까. 오래 갈 상태는 아니겠지.”
“…….”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지금 대학에 재학 중인 류건우의 프로필을 보여주는 걸로 설명을 끝냈다.
누가 봐도 저 녀석이 나이를 덜 먹은 내 모습이라는 건 뻔히 보일 것이다.
‘차라리 증명하기 편하군.’
도움말일 때보다 실물 증거가 있어서 낫다.
게다가 여기서 청려 이놈이 류건우에 대해서 알아봤자 일개 데이터 팔이 녀석에게 뭘 하겠는가.
나는 깔끔하게 선언했다.
“이걸로 내가 아는 건 다 설명했다.”
배팅 끝.
청려는 팔짱을 낀 채로 잠깐 말이 없어졌다.
나는 녀석을 가만히 주시했다.
혹시라도 갑자기 이놈이 도움말 삭제 팝업에서 또 ‘예’를 누르려고 하면 당장 주먹으로 놈의 명치를 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롭게 대화를 재개하는 거지.’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놈이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꺼내긴 했지만.
“예명을 써야겠는데.”
“…?”
이놈 지금 뭐라는 거냐.
“배우를 계속하려면 신분을 쭉 도용해야 하겠지. 발각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본명을 감추는 방향으로… 음, 이 시기의 내 소속사는 그런 이미지를 선호할 테니, 괜찮겠어.”
“무슨 소리냐.”
“음? 건우 씨. 배우로 성공해야죠.”
청려가 빙긋 웃었다.
“잘 해봐요. 응원할 테니까.”
마치 호의를 베풀 듯이.
‘이 새끼 봐라.’
내가 데뷔 때부터 이 패턴을 한두 번 겪는 것 같냐.
나는 머리에 벼락을 맞듯이 이놈의 사고 매커니즘을 깨달았다.
이득!
이놈은 재시작 전에 최대한 다음 삶에 유용할 정보를 긁어가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배우로 활동하면서, 그쪽 업계 정보라도 알아 와라?”
“이해가 빠르네.”
청려 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현장에서 내가 요구하는 정보를 최대한 자세히 알아 와. 지인이 없으니 쓸데없이 활동 중에 구설수에 휘말리진 않겠지.”
“…….”
“흠. 도움말보다 그쪽이 더 유용할 수도 있겠는데.”
이 새끼 자기 혼자 앞서가는 거 봐라.
“내가 왜.”
내 물음에, 청려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간단한 물물교환이지. 나는 네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너는 내게 정보를 주고.”
흠.
“그리고 하나 더.”
청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보를 얻어야 하니, 네가 그 일을 할 동안은 내가 재시작하지 않겠지.”
“…!”
이걸 거는군.
나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분명히 말했다. 네가 재시작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청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로 상관없는 건 아닐 텐데.”
“…….”
“적어도 위험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 단지 그걸 무시할 정도로 화가 났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위험이라는 걸 표출하고 싶었던 거겠고.”
청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데.”
“…….”
“올해 11월까지. 무조건적으로.”
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또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은?”
청려가 웃었다.
“그러지 않겠지만,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 네게 손해는 없어. 애초부터 배우는 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정보는 그 과정에서 저절로 알게 될 테고… 나와 공유한다고 네게 달리지는 건 없지.”
“달라지는 건 네가 내 활동을 지원하는 것뿐이다?”
“정확해. 그리고 그건 네게 확실한 이득일 텐데.”
“…….”
나는 빠르게 계산했다.
그리고 결국 인정했다.
내가 논리적으로 이 새끼랑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누구도 손해 안 보는 협업이긴 하군.’
이 새끼 말투 때문에 꼴 받긴 했지만 말이다.
‘정보원으로 사람 쥐어짤 거면서 혓바닥만 길어서는.’
다단계 피라미드가 고수익 보장한다며 입 터는 거랑 똑같다. 분명 슬슬 간 보다가 결국 선 넘게 정보를 요구하게 되겠지.
‘그때 기싸움 들어갈 걸 염두에 두자고.’
다만 내가 이 과정을 뻔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내게 유리하다.
게다가 하나 더.
‘이놈과 쓸데없이 틀어지는 것보단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여러모로 편해.’
아까 내 정체를 솔직히 이야기할 때부터 생각했지 않은가. 리셋증후군을 자극하지 말자.
이 스탠스의 연장 선상에서 보자면, 압도적으로 추가 기울긴 한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배우로 활동하실 건가요, 건우 씨?”
상상도 못 한 일이다만.
오냐.
“프로필도 찍었으니 그래 보죠.”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청려는 입꼬리를 만족스럽게 틀었다.
뭐, 좋다.
“그럼 저도 청려 씨에게 손해 없는 이야기 하나만 하고 싶은데요.”
“흠?”
“의식주는 네가 보장해라.”
정보원 복지 좀.
이왕 이렇게 된 거 뜯을 건 뜯자.
“…어렵지 않지.”
딜.
나는 운전석에 앉은 녀석과 악수했다.
잠시 후.
드르르륵-
“회사?”
“집주인.”
대기실에서 짐을 챙기던 나는 드디어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찾아 주단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비상! 타겟 접근 중.
-회피가 안전하지만 과감히 접촉해도 의외의 성과가 날 수도 있죠.
-형?
-흠, 벌써 상황은 종료됐겠군요…
아무래도 청려가 여기 들린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연락을 계속 시도한 모양이었다.
내가 보진 못했다만, 그래도 애쓰긴 했군.
‘특이한 놈인데 할 때는 또 기특한 면도 있단 말이지.’
나는 주단에게 보낼 답장을 타이핑 했다.
-타겟 접촉 완료.
-정보 교환 중.
그렇게 됐다.
그리고 나는 약간 고민하다가, 피식 웃으며 메시지를 덧붙였다.
-정보 값으로 오피스텔 받음.
너 이런 거 좋아할 거 안다.
예상대로, 곧 스마트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JSA.
“후우.”
“고생하셨습니다….”
도트 박문대를 들여다보던 건장한 성인 무리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박문대의 체력 막대기는 눈에 띌 정도로 길어졌으며, 노란색이었다.
“절반은 왔어요.”
“그 말은…?”
“네.”
큰달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두세 번만 더 하면, 형을 데려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목적지가 바로 목전이었다. 사람들이 각자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
“또 뭔데.”
“문대 형 새로운 꿈 꿔요? 배세진 형이 줬어요?”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청려는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촬영장을 벗어나 이동 중인 듯한 박문대의 배경으로 짧게 교통수단이 지나갔다.
선팅된 차량의 안.
‘…….’
그는 단번에 그 내부를 알아보았다.
과거, 자신이 자주 사용하던 회사 법인 명의 차량 내부였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박문대는, 과거의 자신을 만났다.
그것도 상대의 차량에 탑승할 정도로 연관된 상태.
청려는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