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477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77화
“…….”
차유진은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해안선,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닷가 특유의 신선하고 짜릿한 냄새가 폐까지 들어왔다.
여름이지만 물가의 새벽은 적당히 견딜 만큼 덥다. 그래서 이 강화도의 해변은 그가 있던 샌디에이고의 해변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기였다.
전에는 이럴 때면 쉽게 페이스를 회복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이제 차유진은 먼지를 털어내듯 간편히 ‘패배자스러운 감정’을 밖으로 불어 날려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는 이전처럼은, 불가능했다.
‘엿 같네.’
그래서 그는 침착해지기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이곳에서 입 닥치고 30일을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면.
하지만,
“차유진!”
“…!”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마스크를 쓴 침침한 인영이 보였다.
어둡다는 뜻이 아니었다.
새벽 일몰을 등지고 달려오고 있기에, 그 빛 때문에 침침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어두운 실루엣만으로도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몇 년이나 본 사람이니까.
-…잘 가. 차유진.
귀국길에 마지막으로 인사했던 동료.
“김래빈.”
그러나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깨달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지.’
뱃속이 불편해졌다.
그 와중에도 ‘김래빈’-어쨌든 이름은 똑같으니까!-은 해안가를 달려와서 외쳤다.
“정말 여기 있었어?!”
자신을 찾아내다니.
‘이곳의 차유진’도 이 장소에 무슨 특별한 추억이라도 가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아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난 여기 있지. 그런데 넌 네 친구를 찾는 거 아니야?”
“…??”
“그럼 돌아가. 그런 사람은 없는 모양이니까. 나는 네 친구가 아니고.”
그토록 말이 매끄럽게 나올 수가 없었다. 차유진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굳이 표출하지 않으며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아니! 너는 내 친구가 맞아.”
“…!”
김래빈도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차유진은 알았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야.’
그저 알아낸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확신이, 김래빈의 목소리에 굳게 깃들어 있었다.
“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이 다르다는 건 동의해. 하지만 참가 전까지 우리가 쌓은 친분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참가 전이라고?’
차유진은 무심코 속으로 되묻다가, 바로 깨달았다.
참가 전.
같은 소속사에서 같이 연습하던 시절.
“그렇다면 나는 네가 연습생 시절에 만난 친구가 맞아. 너도 내가 연습생 시절 함께 수학한 차유진이 맞고!”
“…….”
“그건 우리가 같은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
차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김래빈이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논리를 찾아냈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맙소사.’
그리고 그건… 지난 몇 년 동안 쉽게 볼 수 있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었다.
아직 데뷔하기 전, 그리고 데뷔하고 나서도 몇 번은… 앨범을 준비할 때.
-이렇게 진행하면 분명 현대적 매력을 전달하면서도 완성도 있는 무대가 나올 겁니다.
저런 모습을 간혹 봤던 기억이 났다.
…아니, 그게 아니다.
‘내 친구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김래빈은 본래 저런 사람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예의 바르고 겸손해 보이지만, 고집 강하고 양보하지 않는 일면.
자기 확신.
뻔뻔할 정도로 확고한 세계관.
그리고 그걸 아집이 아니게 만드는… 재능.
오랜 동료의 좋은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만들었다.
“…….”
분명 차유진도 알았다.
‘같은 사람은 아니야.’
저건 내가 알던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직접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공통점들이 있어.’
차유진도 이제 겨우 20대였을 뿐이다.
갑자기 처박힌 낯선 세상, 막다른 코너에서 증명한 확실한 친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맞아.]
최초의 인정이었다.
때마침 파도가 쳤다. 차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못 알아들었겠지.’
그러나 한국어로 다시 대답해 줄 것도 없이, 더 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음?
차유진이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내 말을 알아들었어?”
“단어 수준의 간단한 영어는 작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어. 펀치라인을 맞추는 것에 도움이 되니까.”
“Oh.”
차유진은 순간 어떤 곡을 작곡하고 있냐고 하마터면 물어볼 뻔했으나, 곧 현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의미 없으니까.
“…?”
그 부자연스러운 끊김을 김래빈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어쨌든 결심한 대로 계속 대화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약간 편해진 분위기를 틈타, 박문대의 조언을 떠올렸다.
-정말 차유진을 만난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말해.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다.
김래빈은 일단 자신의 판단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너 밥은 먹었어?”
의식주!
잠을 못 잤을 테니 식사라도 챙기는 것이 옳았다.
차유진은 순간 당황했으나, 곧 픽 웃으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럼 이른 시간이지만 아침 식사부터 하자.”
“괜찮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자 김래빈이 흡사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야?”
“…….”
“…! 아니면 혹시 워낙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어?”
그놈의 자유.
차유진은 턱을 괸 채로 파도를 쳐다보다가, 무심코 대답했다.
“나는 정비소에서 일했어.”
“…….”
5년간의 활동은 마치 없던 일처럼 끝났었다. 그렇게 귀국한 뒤, 그가 시작한 일을.
“내 부모님이 서핑보드점 주겠다고 하셨는데, 나는 싫다고 했어.”
매일 해변에서 서핑보드나 타며 시시덕거리는 얼간이들을 온종일 만나며 떠드는 건 더없이 짜증 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한심한 삶에 처박히고 싶은데, 인생을 낭비하는 얼간이는 만나기 싫은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차량정비소?”
“응.”
“재밌었어?”
“별로.”
하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차유진은 뭐든지 썩 못 해본 역사가 없었다. 정비소에서도 금세 손과 몸을 쓰는 일에 적응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안 해서 좋았어.”
“…….”
왜 스티어 차유진은 계약이 끝나자마자 귀국했는가.
사실 그에게 아예 타 소속사의 오퍼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 대단한 소속사는 아니었으나, 작은 소속사에서는 몇몇 제안이 왔다.
어쩌면 앨범 한두 장 정도는 더 내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No.
‘이미 너무 멀리 왔어.’
그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원래, 그에겐 할아버지에게 배워서 발전시킨- 아주 간단한 인생의 지론이 있었다.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찾아낸다.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깔끔히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시도한다.
차유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데뷔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스티어의 차유진’으로 지낸 지난 몇 년간은 약간 달랐다.
‘깔끔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멤버가 마약으로 구속되고, 선택하지 않은 곡이 타이틀이 되고, 참여하지 않은 기획에 그룹의 이름이 붙고, 앨범이 취소되고…….’
그리고 루머.
루머와 루머와, 손 쓸 수 없는 환경.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는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버텼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낭비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결과적으로, 남은 건 없었다.
-스티어, 계약 종료.
“…….”
성장도, 반전도 일어나지 않은 엔딩.
거기까지 왔으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포기할 타이밍을 지나쳐왔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는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게 만들어.”
그래서 고통스럽다.
포기하지 않는 멍청한 선택의 대가가 엉뚱하게 주어진 세상은 지나치게 완벽했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게 성공적이다.
[난 그냥… 모든 게 완벽한 이 빌어먹을 세상을, 왜 내가 봐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
그건 차마 영어로도 말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차유진은 스페인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김래빈은 대체 무슨 말인지 다그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예민하지 않은 자신의 사회성으로나마 그 말투에 담긴 감정을 파악하려 묵묵히 노력했을 뿐이다.
‘힘든 것 같다.’
그리고 그 핵심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김래빈은 그냥 조용히 차유진의 옆에 앉아서 바다나 같이 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말주변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
그리고 그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쏴아아아-
파도가 빛에 반사되고, 살짝 물결쳤다.
평온한 바닷가 앞에서, 차유진은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입 밖에 내서 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덕분에 김래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제 8시라 아침 식사를 하기 적당한 시간이야.”
“그래.”
둘은 바닷가 바위에서 일어났다.
발자국이 삐뚤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남았다.
* * *
그리고 김래빈이 미리 멤버들에게 알아놓은, 독방이 있는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김래빈은 이제 아예 편하게 본인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차유진, 혹시 형들이 싫어?”
“크흡,”
그렇다.
그냥 대놓고 말이다.
물 마시던 차유진은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어차피 숙소도 나온 마당이라는 생각에,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불편해.”
“또 다른 차유진을 위해 너의 자유를 침해하려 하신다고 느끼기 때문에? 혹은 그 차유진을 투영하며 너를 대하시기 때문에?”
“Umm… 맞아.”
차유진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워낙 노골적으로 김래빈이 말한 탓이었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더 솔직하고 구체적인 대답까지도 가져오게 됐다.
호의,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대 형’?”
음?
김래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차유진이 오묘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수상해.”
“…!”
“그 사람,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
김래빈은 입을 떡 벌렸다.
“그… 문대 형께서는 원래 우리 모두에 대해서 잘 기억하시는데 이 그룹의 기획을 맡고 계시기에….”
“Nope! 그런 의미 아니야. 나에 대한 거야.”
“…?”
“너희 말고 나.”
차유진은 자신을 가리켰다.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김래빈이 ‘문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스티어 차유진에 대해서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스티어는 객관적으로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룹이다.
‘심지어 보이밴드였는데.’
그걸 동성인 남자가 그렇게까지 사정을 잘 알고 있기는 힘들다. 이름이라도 한 번 들어본 게 한계일 것이다. 그것도 안 좋은 루머 쪽으로만.
하지만 ‘박문대’라는 사람의 태도는 어땠는가.
-입 다물어.
-…그건 굳이 안 봐도 괜찮아.
결정적인 순간마다 막는다.
정확히, 자신의 그룹이 가진 트리거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사실에 입각해서.
“Too much, 그러니까… 자연스럽지 않아.”
“…….”
차유진은 그것을 자세히 이 김래빈에게 설명해줄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꺼림칙하다는 것 정도는 경고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하지만.
“그럼 직접 물어보자!”
“What?”
김래빈은 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김래빈 미쳤어?”
“안 미쳤어, 바보야!”
“바….”
차유진이 간 만에 듣는 한국어 욕에 당황한 순간, 김래빈은 아무렇지 않게 통화에 성공했다.
“예, 형!”
그리고 잠시 후.
“…….”
“…….”
아직 인파 없는 강화도 바닷가 백반집 룸에 사람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안녕.”
‘문대 형’은 하루 사이에 눈 밑이 퀭해졌다.
안 그래도 그리 건강한 혈색이거나 사나운 인상이 아니었던 사람이었는데, 더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음…….’
차유진은 옅은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경계심이 먼저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로 태세를 가다듬으려 했으나,
“형, 차유진이 형에게 가진 의문이 있다고 합니다!”
김래빈은 먼저 차유진이 가졌던 의문을 박문대에게 직접 쏟아냈다.
‘김래빈!’
차유진이 속으로 고함을 지르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시선을 맞추고 반사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순간.
눈앞의 ‘문대 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 그건.”
그리고 대인관계에 기민한 차유진은 바로 그 동작의 뉘앙스를 눈치챘다.
이 사람….
“관심이 있어서.”
“…??”
“관심이 있어서 그냥 활동 좀 챙겨봤던 거라고.”
이 사람은, 민망해하고 있었다.
‘맙소사.’
박문대.
전 류건우는 그렇게 상상도 못 한 타이밍에 가수 본인 앞에서 덕밍아웃을 하게 됐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77화
“…….”
차유진은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해안선,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닷가 특유의 신선하고 짜릿한 냄새가 폐까지 들어왔다.
여름이지만 물가의 새벽은 적당히 견딜 만큼 덥다. 그래서 이 강화도의 해변은 그가 있던 샌디에이고의 해변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기였다.
전에는 이럴 때면 쉽게 페이스를 회복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맑아지지 않았다.
정확히 서술하자면, 이제 차유진은 먼지를 털어내듯 간편히 ‘패배자스러운 감정’을 밖으로 불어 날려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는 이전처럼은, 불가능했다.
‘엿 같네.’
그래서 그는 침착해지기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이곳에서 입 닥치고 30일을 버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없다면.
하지만,
“차유진!”
“…!”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마스크를 쓴 침침한 인영이 보였다.
어둡다는 뜻이 아니었다.
새벽 일몰을 등지고 달려오고 있기에, 그 빛 때문에 침침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어두운 실루엣만으로도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몇 년이나 본 사람이니까.
-…잘 가. 차유진.
귀국길에 마지막으로 인사했던 동료.
“김래빈.”
그러나 입에서 이름이 나오는 순간, 깨달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지.’
뱃속이 불편해졌다.
그 와중에도 ‘김래빈’-어쨌든 이름은 똑같으니까!-은 해안가를 달려와서 외쳤다.
“정말 여기 있었어?!”
자신을 찾아내다니.
‘이곳의 차유진’도 이 장소에 무슨 특별한 추억이라도 가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아주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난 여기 있지. 그런데 넌 네 친구를 찾는 거 아니야?”
“…??”
“그럼 돌아가. 그런 사람은 없는 모양이니까. 나는 네 친구가 아니고.”
그토록 말이 매끄럽게 나올 수가 없었다. 차유진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굳이 표출하지 않으며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아니! 너는 내 친구가 맞아.”
“…!”
김래빈도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차유진은 알았다.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야.’
그저 알아낸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확신이, 김래빈의 목소리에 굳게 깃들어 있었다.
“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우리가 경험한 시간이 다르다는 건 동의해. 하지만 참가 전까지 우리가 쌓은 친분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참가 전이라고?’
차유진은 무심코 속으로 되묻다가, 바로 깨달았다.
참가 전.
같은 소속사에서 같이 연습하던 시절.
“그렇다면 나는 네가 연습생 시절에 만난 친구가 맞아. 너도 내가 연습생 시절 함께 수학한 차유진이 맞고!”
“…….”
“그건 우리가 같은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
차유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김래빈이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논리를 찾아냈다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맙소사.’
그리고 그건… 지난 몇 년 동안 쉽게 볼 수 있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었다.
아직 데뷔하기 전, 그리고 데뷔하고 나서도 몇 번은… 앨범을 준비할 때.
-이렇게 진행하면 분명 현대적 매력을 전달하면서도 완성도 있는 무대가 나올 겁니다.
저런 모습을 간혹 봤던 기억이 났다.
…아니, 그게 아니다.
‘내 친구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김래빈은 본래 저런 사람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예의 바르고 겸손해 보이지만, 고집 강하고 양보하지 않는 일면.
자기 확신.
뻔뻔할 정도로 확고한 세계관.
그리고 그걸 아집이 아니게 만드는… 재능.
오랜 동료의 좋은 모습을 다시 보는 것은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만들었다.
“…….”
분명 차유진도 알았다.
‘같은 사람은 아니야.’
저건 내가 알던 그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직접 말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공통점들이 있어.’
차유진도 이제 겨우 20대였을 뿐이다.
갑자기 처박힌 낯선 세상, 막다른 코너에서 증명한 확실한 친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인정이었다.
때마침 파도가 쳤다. 차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못 알아들었겠지.’
그러나 한국어로 다시 대답해 줄 것도 없이, 더 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음?
차유진이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내 말을 알아들었어?”
“단어 수준의 간단한 영어는 작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어. 펀치라인을 맞추는 것에 도움이 되니까.”
“Oh.”
차유진은 순간 어떤 곡을 작곡하고 있냐고 하마터면 물어볼 뻔했으나, 곧 현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의미 없으니까.
“…?”
그 부자연스러운 끊김을 김래빈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어쨌든 결심한 대로 계속 대화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약간 편해진 분위기를 틈타, 박문대의 조언을 떠올렸다.
-정말 차유진을 만난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말해.
그래서 정말 그렇게 했다.
김래빈은 일단 자신의 판단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너 밥은 먹었어?”
의식주!
잠을 못 잤을 테니 식사라도 챙기는 것이 옳았다.
차유진은 순간 당황했으나, 곧 픽 웃으며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럼 이른 시간이지만 아침 식사부터 하자.”
“괜찮아.”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자 김래빈이 흡사 경악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끼니를 거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야?”
“…….”
“…! 아니면 혹시 워낙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어?”
그놈의 자유.
차유진은 턱을 괸 채로 파도를 쳐다보다가, 무심코 대답했다.
“나는 정비소에서 일했어.”
“…….”
5년간의 활동은 마치 없던 일처럼 끝났었다. 그렇게 귀국한 뒤, 그가 시작한 일을.
“내 부모님이 서핑보드점 주겠다고 하셨는데, 나는 싫다고 했어.”
매일 해변에서 서핑보드나 타며 시시덕거리는 얼간이들을 온종일 만나며 떠드는 건 더없이 짜증 났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한심한 삶에 처박히고 싶은데, 인생을 낭비하는 얼간이는 만나기 싫은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차량정비소?”
“응.”
“재밌었어?”
“별로.”
하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차유진은 뭐든지 썩 못 해본 역사가 없었다. 정비소에서도 금세 손과 몸을 쓰는 일에 적응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안 해서 좋았어.”
“…….”
왜 스티어 차유진은 계약이 끝나자마자 귀국했는가.
사실 그에게 아예 타 소속사의 오퍼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 대단한 소속사는 아니었으나, 작은 소속사에서는 몇몇 제안이 왔다.
어쩌면 앨범 한두 장 정도는 더 내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No.
‘이미 너무 멀리 왔어.’
그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원래, 그에겐 할아버지에게 배워서 발전시킨- 아주 간단한 인생의 지론이 있었다.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찾아낸다.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깔끔히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시도한다.
차유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데뷔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스티어의 차유진’으로 지낸 지난 몇 년간은 약간 달랐다.
‘깔끔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멤버가 마약으로 구속되고, 선택하지 않은 곡이 타이틀이 되고, 참여하지 않은 기획에 그룹의 이름이 붙고, 앨범이 취소되고…….’
그리고 루머.
루머와 루머와, 손 쓸 수 없는 환경.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그는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버텼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낭비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후.
결과적으로, 남은 건 없었다.
-스티어, 계약 종료.
“…….”
성장도, 반전도 일어나지 않은 엔딩.
거기까지 왔으면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포기할 타이밍을 지나쳐왔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는 내가 너무 많이 생각하게 만들어.”
그래서 고통스럽다.
포기하지 않는 멍청한 선택의 대가가 엉뚱하게 주어진 세상은 지나치게 완벽했다.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게 성공적이다.
“…….”
그건 차마 영어로도 말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차유진은 스페인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김래빈은 대체 무슨 말인지 다그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예민하지 않은 자신의 사회성으로나마 그 말투에 담긴 감정을 파악하려 묵묵히 노력했을 뿐이다.
‘힘든 것 같다.’
그리고 그 핵심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김래빈은 그냥 조용히 차유진의 옆에 앉아서 바다나 같이 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말주변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
그리고 그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쏴아아아-
파도가 빛에 반사되고, 살짝 물결쳤다.
평온한 바닷가 앞에서, 차유진은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입 밖에 내서 누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덕분에 김래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제 8시라 아침 식사를 하기 적당한 시간이야.”
“그래.”
둘은 바닷가 바위에서 일어났다.
발자국이 삐뚤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남았다.
* * *
그리고 김래빈이 미리 멤버들에게 알아놓은, 독방이 있는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김래빈은 이제 아예 편하게 본인의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차유진, 혹시 형들이 싫어?”
“크흡,”
그렇다.
그냥 대놓고 말이다.
물 마시던 차유진은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어차피 숙소도 나온 마당이라는 생각에, 솔직한 대답을 들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불편해.”
“또 다른 차유진을 위해 너의 자유를 침해하려 하신다고 느끼기 때문에? 혹은 그 차유진을 투영하며 너를 대하시기 때문에?”
“Umm… 맞아.”
차유진은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워낙 노골적으로 김래빈이 말한 탓이었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더 솔직하고 구체적인 대답까지도 가져오게 됐다.
호의,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걱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대 형’?”
음?
김래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차유진이 오묘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수상해.”
“…!”
“그 사람,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
김래빈은 입을 떡 벌렸다.
“그… 문대 형께서는 원래 우리 모두에 대해서 잘 기억하시는데 이 그룹의 기획을 맡고 계시기에….”
“Nope! 그런 의미 아니야. 나에 대한 거야.”
“…?”
“너희 말고 나.”
차유진은 자신을 가리켰다.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김래빈이 ‘문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스티어 차유진에 대해서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
스티어는 객관적으로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그룹이다.
‘심지어 보이밴드였는데.’
그걸 동성인 남자가 그렇게까지 사정을 잘 알고 있기는 힘들다. 이름이라도 한 번 들어본 게 한계일 것이다. 그것도 안 좋은 루머 쪽으로만.
하지만 ‘박문대’라는 사람의 태도는 어땠는가.
-입 다물어.
-…그건 굳이 안 봐도 괜찮아.
결정적인 순간마다 막는다.
정확히, 자신의 그룹이 가진 트리거가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사실에 입각해서.
“Too much, 그러니까… 자연스럽지 않아.”
“…….”
차유진은 그것을 자세히 이 김래빈에게 설명해줄 수는 없었지만, 어딘지 꺼림칙하다는 것 정도는 경고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하지만.
“그럼 직접 물어보자!”
“What?”
김래빈은 바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김래빈 미쳤어?”
“안 미쳤어, 바보야!”
“바….”
차유진이 간 만에 듣는 한국어 욕에 당황한 순간, 김래빈은 아무렇지 않게 통화에 성공했다.
“예, 형!”
그리고 잠시 후.
“…….”
“…….”
아직 인파 없는 강화도 바닷가 백반집 룸에 사람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안녕.”
‘문대 형’은 하루 사이에 눈 밑이 퀭해졌다.
안 그래도 그리 건강한 혈색이거나 사나운 인상이 아니었던 사람이었는데, 더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음…….’
차유진은 옅은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경계심이 먼저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로 태세를 가다듬으려 했으나,
“형, 차유진이 형에게 가진 의문이 있다고 합니다!”
김래빈은 먼저 차유진이 가졌던 의문을 박문대에게 직접 쏟아냈다.
‘김래빈!’
차유진이 속으로 고함을 지르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시선을 맞추고 반사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순간.
눈앞의 ‘문대 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 그건.”
그리고 대인관계에 기민한 차유진은 바로 그 동작의 뉘앙스를 눈치챘다.
이 사람….
“관심이 있어서.”
“…??”
“관심이 있어서 그냥 활동 좀 챙겨봤던 거라고.”
이 사람은, 민망해하고 있었다.
‘맙소사.’
박문대.
전 류건우는 그렇게 상상도 못 한 타이밍에 가수 본인 앞에서 덕밍아웃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