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405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05화
발레리노 선아현은 다른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목적지로 향하는 단 하나의 오솔길을 정성스럽게 걸어가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길은 때론 가파르거나 거칠기도 했으나 목적지가 보였고, 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그의 발을 계속 움직이도록 했다.
책임감만이.
‘처음 시작했을 때는… 즐거웠는데.’
새로운 도전과 표현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춤은 너무나 매력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국제 콩쿠르에서 갑작스레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우승한 후, 모든 것이 변했다.
‘아.’
-아현아, 넌 이걸 하려고 태어난 거야!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다.
에이전시가 붙고, 기사가 몰아치고, 유명세가 생기고, 어마어마한 타이틀과 소속이 생긴다.
완벽한 최선의 길이 드러난 이상, 이제 자신은 다른 시도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기대와 충고에 반항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발레를 통한 더 큰 성공을 목표로 하는 인생만이 남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인생을 바칠 만큼 이 일을 경험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못 견딜 만한 일은 아니었다. 춤은 즐거운 일이니까.
‘원하는 걸 다 해보며 선택할 수는 없어.’
상담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모든 걸 포기할 만큼 힘들지는 않았기에, 에이전시에서 붙여준 상담사는 자신에게 불가능한 장기 휴식이나 진로 변경을 권유하진 않았다.
하지만 체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앞날에 대한, 매몰된 확신이.
‘나는… 앞으로 다른 건 할 수 없을 거야.’
이미 유년기와 청년기 절반을 다 쏟아부었다.
변변한 친구도, 사회 경험도 없다. 공부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이 궤도에서 이탈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회사를, 부모님을, 이해 관계자들을 불확실한 불안과 걱정으로 괴롭힐 수는 없었다.
이 실패 없는 인생을 망칠 수가 없었다.
‘내가 의심과 걱정이 없는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선아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취미를 가지지 않고, 다른 인맥과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반경을 좁히는 것이다.
미련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했다.
-이번 수석 발레리노는 아현일 거야. 역시!
-그러면 광고는 이렇게 세 개만 더 찍는 걸로 할게요. 괜찮죠, 아현 씨?
위치는 점점 견고해진다.
절대로 이걸 깨고 나갈 수 없다. 실패하면 안 된다.
‘그래.’
그래서 선아현의 길이 완전히 굳어졌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만났다.
스케줄 차 들린 방송국 세트, 그 복도에 혼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참가자를.
-저… 괜찮으세요?
그 사람을 어떻게든 격려해보겠다며 자신이 쏟아낸 말들이 낯설었다.
-꼭 좋은 결과만이 답은 아니에요.
-스스로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은 선택도 답이에요.
‘나는….’
그렇게 쉽게 놓아버리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토록 확신 어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마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상해.’
하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대안도 정답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이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대는 결국 기운을 차리고 다른 방향으로 멋진 결과를 낸다.
-와, 진짜 잘 만들었다.
-제일 좋았어요.
자신은 일회성 멘토일 뿐인데, 그것이 이상한 울렁거림과 감동을 주었다.
그 모든 상황과 그 사람이.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대를 잘 마쳤습니다.
그래서 류건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그는 자신이야말로 감사하다고 더 진지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부담이 될 것 같았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더 친해져서 말해보고 싶었다.
이 참가자에게 말했던, 낯설게까지 느껴지던 자신의 마음가짐을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번호를 교환하며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참가자가 뒤돌아 사라지던 복도에서… 보았다.
‘어?’
-……해?
인이어를 찬 금발의 누군가가, 백스테이지로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무대의상과 잡아당길 듯 뻗은 손.
“…!”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 이상한 잔상은 금방 사라졌다.
환상이라기엔 비정상적일 만큼 뚜렷한 이미지였다.
‘아.’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선아현은 불안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마치 잘못된 일을 고치는 것처럼 묘한 다짐이 머리에 새겨진다.
‘괜찮아.’
오히려 더 보고 싶었다. 선아현은 잔상을 잊지 않기 위해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잔상은 이후로도 불쑥불쑥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석을 볼 때, 대기실에서 준비할 때, 방송국에 갈 때.
우울해하던 그 아이돌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해 볼 때.
-와아아!
더 시끄럽고, 더 북적거리고, 더 많은 고난과 굴곡으로 가득한.
그러나 더 반짝이는, 가슴 떨리는 삶의 이미지들이.
그럴 때면 선아현은 혼란스러워졌으나,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불안감은 이상하게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잔상은 진해지며 연결성이 생기고, 스토리가 생긴다.
점선으로 연결된 이미지들.
‘뭘까.’
선아현은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내면에 맞추고, 간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무대를 콘서트에서 했었잖아.”
그 말에 족쇄가 풀린 듯이 모든 이미지 사이에 소리와 움직임이 깃든다.
그리고 간직하던 잔상들에 의미가 생기며, 기억이 된다.
진짜 삶이.
“……그때.”
이윽고, 선아현은 깨달았다.
‘아.’
자신은 발레리노가 아니었다.
발레리노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무용을 그만두었던 선아현이었다.
그러나….
‘행복했어.’
선아현은 아이돌이 되었다.
“풍선, 들고 했잖아….”
그는 첫 콘서트의 즐겁던 유닛 무대를 떠올렸다. 그다음 단체 무대를, 뒤풀이를.
말을 더듬던 자신을, 포기하던 자신을, 억지를 부리던 자신을, 친구를 의심하던 자신을.
“…문대야.”
실패해도 괜찮던 것이다.
발레를 그만둔다고 그걸 배우던 자신이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무자비한 괴롭힘과 포기한 학창 시절로 무너진 일상도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었다.
인생은 망가진 채 끝나지 않는다.
다시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걸어갈 수 있다면.
‘맞아.’
그리고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아무 끔찍한 실패 없이,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내면의 불안과 공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도리어 테스타의 선아현이 가졌던 트라우마를 지운다.
삶의 기로에서 나약한 선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나도… 그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야. 다른 멤버들처럼.’
스스로 매몰된 모든 의문과 의심이 상쇄된다.
가장 최초.
주저앉지 않고, 경로를 이탈해도 새로운 길로 달려갈 수 있도록 다잡아준 말이 떠오르며.
-그냥 ‘이걸 해내겠다’ 정도만 생각해.
그리고 지금, 그 계기를 주었던 사람과 마주 보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원래부터 기억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거고.”
“으응.”
나는 선아현과 대기실로 빠졌다.
1부에서 이미 수상한 선아현은 객석으로 좀 늦게 돌아가도 괜찮았고, 나는 애초에 노미네이트도 안 됐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놈과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선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지금, 완전히 기억이 났어.”
생김새야 다를 게 없었지만, 그 표정과 동작, 말투에서 드러난다.
이건 내가 아는 선아현이었다.
“…….”
나는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말을 못 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잘 돌아왔다.”
“으응…!”
놈은 양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정말로 여전한… 놈이다.
‘…좀.’
진정하고 넘어가자. 오랜만에 봐서 뭐 해후를 풀고 이런 것보다 상황 파악이 먼저니까.
논제.
-선아현은 어떻게 정신을 차렸는가.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놈은 몇 번의 잔상 끝에, 방금 내 질문에서 완전히 ‘깨어나듯’ 자신의 자아를 확립했다고 한다.
“콘서트 이야기 때문에.”
“맞아….”
그게 계기가 됐다면, 계속 쌓여왔다는 뜻이다.
“문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갑자기.”
선아현은 잔상이 떠오를 때마다 잘 기억해서 등장인물들을 연결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본인 잔상에 등장한 박문대라는 것을 중간에는 몰랐던 것 같은데….
“내가 박문대인 건 어떻게 알아본 건데.”
선아현의 눈이 커진다.
마치 이런 당연한 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것 같은 표정이군.
“…! 그, 외모가 약간 달라도… 너무 문대 같아서.”
“아.”
“그리고… 이야기했었으니까.”
놈이 얼굴을 붉히더니, 진지하게 한 자, 한 자 말한다.
“문대는, 원래 류건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
“기억하고, 있어…. 당연히.”
아.
나는 그 당시를 떠올렸다.
다짜고짜 떠든다는 멍청한 짓거리를 다 하다가 결국 민폐의 끝에서 겨우 페이스를 되찾고 선아현을 납득시킨 내 흑역사 말이다.
‘…….’
하지만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나는 약간 평가를 고치기로 했다.
어쩌면, 말하자고 결정한 것 자체는 실수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고맙다.”
“…! 아, 아니야! 친구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니까.”
선아현은 밝게 웃었다. 다른 수가 없어서 나도 웃고 말았다.
‘기억이 돌아오면 쓸데없이 혼란스러워할 거라 생각했는데.’
선아현은 전혀 고통이나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전보다 편해 보였다.
‘배세진이 맞았군,’
-겉이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속까지 똑같을지는 모르는 거야
인정하겠다. 그놈 1승이다.
이후로는 놈에게 빠르게 현 상황에 대해서 전달했다.
더 자세히 말해서 논리를 어떻게든 보강해 납득시켜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더는 없었다.
“더 자세한 건 시상식 끝나고 통화로 하자.”
“응!”
대신 더 늦기 전에 빠르게 시상식 자리로 복귀했다.
노미네이트된 둘과 같이 공연한 덕에 임시 자리를 얻은 나도 둘의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왜 이렇게 늦었냐’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던 배세진은, 선아현의 표정을 체크하자마자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고 VCR이 들어간 틈을 타 나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설마….’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세진의 얼굴에 미소가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 옆에 앉은 선아현을 찌른다.
‘너!’
‘안녕하세요, 세진 형…!’
흥분한 배세진과 선아현이 손짓 발짓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둘이 친목으로 기사 하나 뜨겠군.
나는 피식 웃으며 VCR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시상식이 재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선아현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테스타 단체메시지방은 7명이 전부 채워졌다.
[선아현 : 안녕하세요..!]
[큰세진 : 아 미친]
[큰세진 : 아니 욕 죄송해요 아 근데 아현이 드디어 왔잖아요ㅠㅠ 진짜 대환영이야!]
[차유진 : Wooooow 우리 별 일곱 개 모였어요 (선글라스 낀 이모티콘)]
[류청우 : 말 들었어 아현아 정말잘 됐다 (미소 짓는 이모티콘) 아니 아현 형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선아현 :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나는 나이가 섞인 놈들이 호칭 정리로 대혼란에 빠질뻔하다가도 다시 신나게 대화로 복귀하는 메시지방을 침대에 누워서 쭉 내렸다.
여기서 절반은 사실 이 숙소에 있지만, 좀 다른 느낌이긴 했다.
‘선아현한테 연락은 몇 분 뒤에 할까.’
좀 더 떠들 게 두고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해줘야겠다.
그 전에 머릿속에 의문부터 좀 정리하고.
‘흠.’
뭐, 결과적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결론이 나긴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왜 선아현만 자력으로 기억을 되찾은 건지는 추론해봐야지.
‘아직도 상태창에는 선아현 없지.’
[네!]
일단 시스템이 관여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기존 각성과 차이점이 있나?’
고민해 본 결과, 하나가 생각났다.
선아현은 다른 놈들이 각성할 때 흔히 보이던 두통이나 어지럼증 따위를 호소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현실의 자아를 되찾았다.
‘…어떻게?’
마치 원래 자기가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자기 능력처럼.
“…!”
그렇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가리를 후려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오오오 뭐 생각나셨어요??]
그래.
선아현이 남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능력 말이다.
‘특성.’
나는 선아현의 특성을 떠올렸다.
[근성(S)]
: 자신의 마음가짐은 스스로 만드는 것. 그렇기에 오롯이 감당할 수 있다.
-활성화 시 정신계열 상태이상 상쇄.(중복 적용 가능)
이거.
지금 이곳의 선아현은 B등급이었지만, 어쨌든 상태이상 상쇄라는 효과는 기본적으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기억이 살짝이라도 돌아오면….’
현실의 선아현이 가진 S등급 특성이 돌아오는 순간, 모든 상태이상이 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이놈이 자력으로 돌아온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행각이었다.
[와 아현 님 진짜 멋있어요!!1 미쳤다!]
아니. 그게….
‘멋있다로 끝날 상황이 아니야.’
[네?]
이건… 힌트였다.
나는 침대 모서리를 꽉 쥐었다.
이 논리의 전제가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상태이상이라는 뜻이지.’
[!!!]
그렇다.
선아현의 특성이 상태이상을 상쇄하는 것이니, 상쇄된 이상 이 모든 상황이 ‘상태이상’이라는 뜻이 된다.
내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이나, 청려의 ‘교정’처럼.
“…….”
[그거 말이 되네요! 애초에 저희가 시스템을 잡으려다가 이 상황에 빠진 거니까, 시스템이 상태이상을 불러왔다고 생각하면….]
잠깐.
‘…시스템을 잡으려고 했다, 라.’
이상하게 그 문장이 입에 맴돌았다.
‘내가 시스템을 없애려고 했다면….’
그리고, 위화감을 눈치챘다.
“…!!”
[혀, 형?]
이런 X발.
나는 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다른 방을 찾아갔다.
“음? 마침 잘 왔어요.”
청려가 있는 방.
룸메이트인 주단이 개인 스케줄로 나간 탓에, 지금은 놈 혼자 있는 방이다.
놈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작성하다가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계속한다.
“다음 달 첫 시상식 말인데, 음원대상 점수 산정이….”
“우리가.”
“음?”
나는 혀를 씹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착각한 게 있어.”
“…….”
생각해보자.
내가 이놈과 비행기를 타서, 태평양 한가운데로 몰고 간 뒤 시스템을 없애려고 했다.
무슨 방법으로?
시스템이 들어갈 숙주가 주변에 아예 없도록 만들어서.
그렇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스템을 없애는 지랄을 하려면 결국 지금 시스템을 가진 놈이 필요하단 말이지.”
“…….”
“그러면 그때 비행기에는 분명 그놈이 타고 있었을 텐데.”
나는 침을 삼켰다.
“그게 누구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놈이 입을 연다.
“음, 글쎄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던 청려는 턱에 손을 괴더니,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듯 눈살을 찌푸린….
잠깐.
나는 피가 식는 기분으로 눈앞의 놈을 쳐다보았다.
멀쩡해 보이잖아.
이 미친 통제광 새끼가, 지금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불쾌감이 일절 안 보인다고.
그건.
“너… 기억하고 있었지.”
“…….”
비행기에 한 놈 더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잊어버렸다는 것도 알았고.”
청려는 책상에 정리하던 노트를 덮어둔다.
그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머리가 좋네요, 후배님.”
이런… X발.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05화
발레리노 선아현은 다른 길을 걸어본 적이 없다.
목적지로 향하는 단 하나의 오솔길을 정성스럽게 걸어가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길은 때론 가파르거나 거칠기도 했으나 목적지가 보였고, 걸음을 멈추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그의 발을 계속 움직이도록 했다.
책임감만이.
‘처음 시작했을 때는… 즐거웠는데.’
새로운 도전과 표현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춤은 너무나 매력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국제 콩쿠르에서 갑작스레 상상 이상으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우승한 후, 모든 것이 변했다.
‘아.’
-아현아, 넌 이걸 하려고 태어난 거야!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다.
에이전시가 붙고, 기사가 몰아치고, 유명세가 생기고, 어마어마한 타이틀과 소속이 생긴다.
완벽한 최선의 길이 드러난 이상, 이제 자신은 다른 시도를 할 수 없었다.
모든 기대와 충고에 반항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발레를 통한 더 큰 성공을 목표로 하는 인생만이 남았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내가… 인생을 바칠 만큼 이 일을 경험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못 견딜 만한 일은 아니었다. 춤은 즐거운 일이니까.
‘원하는 걸 다 해보며 선택할 수는 없어.’
상담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모든 걸 포기할 만큼 힘들지는 않았기에, 에이전시에서 붙여준 상담사는 자신에게 불가능한 장기 휴식이나 진로 변경을 권유하진 않았다.
하지만 체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앞날에 대한, 매몰된 확신이.
‘나는… 앞으로 다른 건 할 수 없을 거야.’
이미 유년기와 청년기 절반을 다 쏟아부었다.
변변한 친구도, 사회 경험도 없다. 공부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이 궤도에서 이탈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회사를, 부모님을, 이해 관계자들을 불확실한 불안과 걱정으로 괴롭힐 수는 없었다.
이 실패 없는 인생을 망칠 수가 없었다.
‘내가 의심과 걱정이 없는 성격이면 얼마나 좋을까?’
선아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취미를 가지지 않고, 다른 인맥과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반경을 좁히는 것이다.
미련이나 호기심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승승장구했다.
-이번 수석 발레리노는 아현일 거야. 역시!
-그러면 광고는 이렇게 세 개만 더 찍는 걸로 할게요. 괜찮죠, 아현 씨?
위치는 점점 견고해진다.
절대로 이걸 깨고 나갈 수 없다. 실패하면 안 된다.
‘그래.’
그래서 선아현의 길이 완전히 굳어졌을 때였다.
예고도 없이 만났다.
스케줄 차 들린 방송국 세트, 그 복도에 혼이 나간 것처럼 앉아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참가자를.
-저… 괜찮으세요?
그 사람을 어떻게든 격려해보겠다며 자신이 쏟아낸 말들이 낯설었다.
-꼭 좋은 결과만이 답은 아니에요.
-스스로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은 선택도 답이에요.
‘나는….’
그렇게 쉽게 놓아버리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토록 확신 어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마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이상해.’
하지만 그 말이 자신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대안도 정답이 될 수 있어요.
자신이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대는 결국 기운을 차리고 다른 방향으로 멋진 결과를 낸다.
-와, 진짜 잘 만들었다.
-제일 좋았어요.
자신은 일회성 멘토일 뿐인데, 그것이 이상한 울렁거림과 감동을 주었다.
그 모든 상황과 그 사람이.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대를 잘 마쳤습니다.
그래서 류건우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그는 자신이야말로 감사하다고 더 진지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부담이 될 것 같았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더 친해져서 말해보고 싶었다.
이 참가자에게 말했던, 낯설게까지 느껴지던 자신의 마음가짐을 정말로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번호를 교환하며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참가자가 뒤돌아 사라지던 복도에서… 보았다.
‘어?’
-……해?
인이어를 찬 금발의 누군가가, 백스테이지로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무대의상과 잡아당길 듯 뻗은 손.
“…!”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그 이상한 잔상은 금방 사라졌다.
환상이라기엔 비정상적일 만큼 뚜렷한 이미지였다.
‘아.’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선아현은 불안하지 않았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마치 잘못된 일을 고치는 것처럼 묘한 다짐이 머리에 새겨진다.
‘괜찮아.’
오히려 더 보고 싶었다. 선아현은 잔상을 잊지 않기 위해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잔상은 이후로도 불쑥불쑥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석을 볼 때, 대기실에서 준비할 때, 방송국에 갈 때.
우울해하던 그 아이돌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해 볼 때.
-와아아!
더 시끄럽고, 더 북적거리고, 더 많은 고난과 굴곡으로 가득한.
그러나 더 반짝이는, 가슴 떨리는 삶의 이미지들이.
그럴 때면 선아현은 혼란스러워졌으나,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는 불안감은 이상하게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잔상은 진해지며 연결성이 생기고, 스토리가 생긴다.
점선으로 연결된 이미지들.
‘뭘까.’
선아현은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내면에 맞추고, 간직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무대를 콘서트에서 했었잖아.”
그 말에 족쇄가 풀린 듯이 모든 이미지 사이에 소리와 움직임이 깃든다.
그리고 간직하던 잔상들에 의미가 생기며, 기억이 된다.
진짜 삶이.
“……그때.”
이윽고, 선아현은 깨달았다.
‘아.’
자신은 발레리노가 아니었다.
발레리노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무용을 그만두었던 선아현이었다.
그러나….
‘행복했어.’
선아현은 아이돌이 되었다.
“풍선, 들고 했잖아….”
그는 첫 콘서트의 즐겁던 유닛 무대를 떠올렸다. 그다음 단체 무대를, 뒤풀이를.
말을 더듬던 자신을, 포기하던 자신을, 억지를 부리던 자신을, 친구를 의심하던 자신을.
“…문대야.”
실패해도 괜찮던 것이다.
발레를 그만둔다고 그걸 배우던 자신이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무자비한 괴롭힘과 포기한 학창 시절로 무너진 일상도 언젠가는 회복할 수 있었다.
인생은 망가진 채 끝나지 않는다.
다시 방향을 잡고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걸어갈 수 있다면.
‘맞아.’
그리고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아무 끔찍한 실패 없이,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내면의 불안과 공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도리어 테스타의 선아현이 가졌던 트라우마를 지운다.
삶의 기로에서 나약한 선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나도… 그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야. 다른 멤버들처럼.’
스스로 매몰된 모든 의문과 의심이 상쇄된다.
가장 최초.
주저앉지 않고, 경로를 이탈해도 새로운 길로 달려갈 수 있도록 다잡아준 말이 떠오르며.
-그냥 ‘이걸 해내겠다’ 정도만 생각해.
그리고 지금, 그 계기를 주었던 사람과 마주 보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원래부터 기억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거고.”
“으응.”
나는 선아현과 대기실로 빠졌다.
1부에서 이미 수상한 선아현은 객석으로 좀 늦게 돌아가도 괜찮았고, 나는 애초에 노미네이트도 안 됐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놈과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선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지금, 완전히 기억이 났어.”
생김새야 다를 게 없었지만, 그 표정과 동작, 말투에서 드러난다.
이건 내가 아는 선아현이었다.
“…….”
나는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말을 못 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잘 돌아왔다.”
“으응…!”
놈은 양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정말로 여전한… 놈이다.
‘…좀.’
진정하고 넘어가자. 오랜만에 봐서 뭐 해후를 풀고 이런 것보다 상황 파악이 먼저니까.
논제.
-선아현은 어떻게 정신을 차렸는가.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놈은 몇 번의 잔상 끝에, 방금 내 질문에서 완전히 ‘깨어나듯’ 자신의 자아를 확립했다고 한다.
“콘서트 이야기 때문에.”
“맞아….”
그게 계기가 됐다면, 계속 쌓여왔다는 뜻이다.
“문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갑자기.”
선아현은 잔상이 떠오를 때마다 잘 기억해서 등장인물들을 연결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본인 잔상에 등장한 박문대라는 것을 중간에는 몰랐던 것 같은데….
“내가 박문대인 건 어떻게 알아본 건데.”
선아현의 눈이 커진다.
마치 이런 당연한 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것 같은 표정이군.
“…! 그, 외모가 약간 달라도… 너무 문대 같아서.”
“아.”
“그리고… 이야기했었으니까.”
놈이 얼굴을 붉히더니, 진지하게 한 자, 한 자 말한다.
“문대는, 원래 류건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
“기억하고, 있어…. 당연히.”
아.
나는 그 당시를 떠올렸다.
다짜고짜 떠든다는 멍청한 짓거리를 다 하다가 결국 민폐의 끝에서 겨우 페이스를 되찾고 선아현을 납득시킨 내 흑역사 말이다.
‘…….’
하지만 쓸모없는 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나는 약간 평가를 고치기로 했다.
어쩌면, 말하자고 결정한 것 자체는 실수가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고맙다.”
“…! 아, 아니야! 친구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일이니까.”
선아현은 밝게 웃었다. 다른 수가 없어서 나도 웃고 말았다.
‘기억이 돌아오면 쓸데없이 혼란스러워할 거라 생각했는데.’
선아현은 전혀 고통이나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전보다 편해 보였다.
‘배세진이 맞았군,’
-겉이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속까지 똑같을지는 모르는 거야
인정하겠다. 그놈 1승이다.
이후로는 놈에게 빠르게 현 상황에 대해서 전달했다.
더 자세히 말해서 논리를 어떻게든 보강해 납득시켜야만 한다는 부담감은… 더는 없었다.
“더 자세한 건 시상식 끝나고 통화로 하자.”
“응!”
대신 더 늦기 전에 빠르게 시상식 자리로 복귀했다.
노미네이트된 둘과 같이 공연한 덕에 임시 자리를 얻은 나도 둘의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왜 이렇게 늦었냐’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던 배세진은, 선아현의 표정을 체크하자마자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고 VCR이 들어간 틈을 타 나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설마….’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세진의 얼굴에 미소가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 옆에 앉은 선아현을 찌른다.
‘너!’
‘안녕하세요, 세진 형…!’
흥분한 배세진과 선아현이 손짓 발짓을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둘이 친목으로 기사 하나 뜨겠군.
나는 피식 웃으며 VCR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시상식이 재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테스타 단체메시지방은 7명이 전부 채워졌다.
나는 나이가 섞인 놈들이 호칭 정리로 대혼란에 빠질뻔하다가도 다시 신나게 대화로 복귀하는 메시지방을 침대에 누워서 쭉 내렸다.
여기서 절반은 사실 이 숙소에 있지만, 좀 다른 느낌이긴 했다.
‘선아현한테 연락은 몇 분 뒤에 할까.’
좀 더 떠들 게 두고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해줘야겠다.
그 전에 머릿속에 의문부터 좀 정리하고.
‘흠.’
뭐, 결과적으로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결론이 나긴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왜 선아현만 자력으로 기억을 되찾은 건지는 추론해봐야지.
‘아직도 상태창에는 선아현 없지.’
일단 시스템이 관여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기존 각성과 차이점이 있나?’
고민해 본 결과, 하나가 생각났다.
선아현은 다른 놈들이 각성할 때 흔히 보이던 두통이나 어지럼증 따위를 호소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현실의 자아를 되찾았다.
‘…어떻게?’
마치 원래 자기가 그럴 수 있었던 것처럼….
자기 능력처럼.
“…!”
그렇지.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대가리를 후려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선아현이 남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능력 말이다.
‘특성.’
나는 선아현의 특성을 떠올렸다.
: 자신의 마음가짐은 스스로 만드는 것. 그렇기에 오롯이 감당할 수 있다.
-활성화 시 정신계열 상태이상 상쇄.(중복 적용 가능)
이거.
지금 이곳의 선아현은 B등급이었지만, 어쨌든 상태이상 상쇄라는 효과는 기본적으로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기억이 살짝이라도 돌아오면….’
현실의 선아현이 가진 S등급 특성이 돌아오는 순간, 모든 상태이상이 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이놈이 자력으로 돌아온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행각이었다.
아니. 그게….
‘멋있다로 끝날 상황이 아니야.’
이건… 힌트였다.
나는 침대 모서리를 꽉 쥐었다.
이 논리의 전제가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상태이상이라는 뜻이지.’
그렇다.
선아현의 특성이 상태이상을 상쇄하는 것이니, 상쇄된 이상 이 모든 상황이 ‘상태이상’이라는 뜻이 된다.
내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이나, 청려의 ‘교정’처럼.
“…….”
잠깐.
‘…시스템을 잡으려고 했다, 라.’
이상하게 그 문장이 입에 맴돌았다.
‘내가 시스템을 없애려고 했다면….’
그리고, 위화감을 눈치챘다.
“…!!”
이런 X발.
나는 당장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다른 방을 찾아갔다.
“음? 마침 잘 왔어요.”
청려가 있는 방.
룸메이트인 주단이 개인 스케줄로 나간 탓에, 지금은 놈 혼자 있는 방이다.
놈은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작성하다가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계속한다.
“다음 달 첫 시상식 말인데, 음원대상 점수 산정이….”
“우리가.”
“음?”
나는 혀를 씹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착각한 게 있어.”
“…….”
생각해보자.
내가 이놈과 비행기를 타서, 태평양 한가운데로 몰고 간 뒤 시스템을 없애려고 했다.
무슨 방법으로?
시스템이 들어갈 숙주가 주변에 아예 없도록 만들어서.
그렇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스템을 없애는 지랄을 하려면 결국 지금 시스템을 가진 놈이 필요하단 말이지.”
“…….”
“그러면 그때 비행기에는 분명 그놈이 타고 있었을 텐데.”
나는 침을 삼켰다.
“그게 누구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놈이 입을 연다.
“음, 글쎄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던 청려는 턱에 손을 괴더니,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듯 눈살을 찌푸린….
잠깐.
나는 피가 식는 기분으로 눈앞의 놈을 쳐다보았다.
멀쩡해 보이잖아.
이 미친 통제광 새끼가, 지금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불쾌감이 일절 안 보인다고.
그건.
“너… 기억하고 있었지.”
“…….”
비행기에 한 놈 더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잊어버렸다는 것도 알았고.”
청려는 책상에 정리하던 노트를 덮어둔다.
그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머리가 좋네요, 후배님.”
이런… 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