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293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93화
아직 그룹명이 정해지지 않은 그룹- 시즌 5 데뷔 조의 최근 일정은 제법 빡빡했다.
데뷔 준비와 동시에 광고, 인터뷰 등 오디션 프로그램 승자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제성은 이전 남자 시즌 테스타의 위상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긴 충분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승리감을 느끼는 구성원도 있었다.
‘연락도 못 해? X나 웃기네.’
채서담은 자신의 스마트폰 속, 아무 반응 없는 한 연락처를 확인했다.
[문대 선배님]
전에 테스타 담당이던 매니저를 슬슬 구슬려 알아낸 번호였다. ‘형님, 형님’거리며 찌질한 놈 띄워주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그 수준에 가오 잡아도 본성이 그렇지.’
채서담은 박문대도 비슷한 부류일 것이라 짐작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말도 못 붙이던 부적응 종자가, 자신이 인기 아이돌이 됐다는 것에 취해서 세게 나오는 걸 보는 게 수치심이 들 정도였다.
‘운 좋은 새끼가 뭐 어째?’
말만 들어서는 무슨 대단히 자기가 봐준다는 투였는데, 결국 있어 보이는 척 그 이상은 없던 것이다.
지금도 채서담 자신이 슬쩍슬쩍 관련 인터뷰나 촬영 때마다 박문대를 들먹이는데도 어떤 반응도 못 하지 않는가.
분명 지레 겁먹은 것이다.
‘빡쳐서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무서워서 못 하는 것 좀 봐.’
그러고 머릿속에서는 자기를 무슨 만화 주인공쯤으로 미화하고 있을 꼴이 뻔했다. 반마다 한둘씩 그 덜떨어지는 놈들 있지 않은가.
‘진짜 운 좋은 게 어디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어.’
그냥 시기와 목 하나 잘 타고 나서 성공한 놈이 이토록 치열히 살아온 자신 같은 서열에게 갑질할 수 있는 게 웃길 뿐이다.
발이 부서져라 연습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리하게 상황을 헤쳐온 자신에게 채서담은 직접 리스펙을 보냈다.
잠시 방심하여 미끄러졌으나 그걸로 끝이다.
‘이젠 그렇게 안 둔다, 내가.’
이대로 박문대를 이용해 한계의 한계까지 그 인지도와 이미지로 이득을 본 후엔, 더 짜릿한 계획이 남아 있었다.
박문대와 다시 마주치는 순간, 못 참고 직접 폭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을 끌어내는 건 그의 특기였으니까.
‘기왕이면 회사에도 일러바치면 더 좋겠다.’
회사에서 덮으려고 하면 그것도 좋은 정황이었다. 그럼 그걸 잘 끌어모아다가 다시 약점으로 삼는다.
‘여차하면 그걸 내가 괴롭힘당했다는 증거로 써서 빠져나갈 수 있어.’
이러면 이미지의 반전까지 일석이조였다.
‘이미 즉석에서 삭제한 녹음본을 핑계로 후배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아이돌!’
“아.”
뒤집힐 상황이 생각만 해도 그럴싸해서 채서담은 만족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는 당시에는 흥분해서 미처 생각을 못 했던 녹음의 또 다른 당사자, 청려에 대한 것도 잠시 떠올렸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것도 다 자신의 계산 내였다고 합리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제스처를 보일 리가 없었다.
‘다 그렇다니까?’
자신에겐 피해가 없으니 박문대가 곤란한 걸 반기고 있을 것이라 채서담은 확신했다. 하하 호호 해도 경쟁자 아닌가.
알아보니 데뷔하자마자 잘된 아이돌이던데 얼마나 성격이 유아적일지 충분히 예상이 갔다.
‘오히려 딜 걸려고 내 쪽에 연락 줄 수도 있어.’
자신은 그 상황에서 저자세로 충분히 예의 바르게 굴었으니 감정 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박문대의 약점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음~”
채서담은 이 눈덩이 굴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논리를 생각하며, 지난 며칠간의 초조함을 깨끗이 버렸다.
‘대담하게 판 잘 짰어.’
삶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아온 오만함이 다시 자라났다.
그리고 이 낙관론이 깨진 것은 며칠 후, 회사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였다.
이제 선배가 된 그의 동기, 선아현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선아현은 학교 다닐 때와 달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놈에게 연차가 밀려서 선배 취급을 해야 한다니.
채서담은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가 운 좋게 잘되지 않았으면 사회생활도 못 했을 게.’
저런 인간이 마치 자신보다 성공한 것처럼 들먹거리는 것은 언제나 부조리의 쓴맛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네가 뭘 어쩔 건데?’
선배라고 유세 부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겨우 만든 사회적 위치를 신경 쓴다면 말이다.
그리고 채서담은 선아현의 유세 정도는… 솔직히 간지럽지도 않았다.
“저, 서담 씨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아, 넵! 서담 형!”
아득바득 말 안 더듬으려는 꼴이 좀 배알이 꼴리긴 했으나, 그는 굳이 자신을 지목해 불러내는 선아현의 행태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녹음기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약점이 하나 더 생기겠네.’
그러나 채서담은 구석의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선아현의 직구를 맞는다.
“많이, 고민 중이야…. 네가 날 괴롭혔다고 사실대로 밝혀야 할지.”
“……!”
뭘 밝힌다고?
채서담은 순간 이게 현실인지 돌아보았다.
그러나 선아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서담아, 나 녹음 있어.”
“……!”
“네가, 너무 무서워서…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해서, 다시 들어보고 이해해 보려고, 녹음을 했었어… 한동안.”
“…….”
“그리고, 아직 남아 있어.”
채서담은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위기 앞에서 느끼는 생존본능이었다.
‘아, 아니지.’
채서담은 겨우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성적이라 착각하며 합리화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것을 비슷하게, 그러나 좀 더 강하게.
‘저렇게 말해도 못 터뜨릴 거라니까?’
터뜨리면 자기도 손해 아닌가? 지금 저렇게 잘나가는 아이돌인데 말이다.
겨우 학교 다닐 때 기분 나빠서 실기 좀 망친 것 가지고 학교폭력으로 나불대긴 힘들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뭘 녹음했는데?’
그가 생각하기엔, 아무리 따져도 자신은 책잡힐 만큼 폭언을 하거나 때린 적이 없었다.
저건 그냥 겁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니… 그래, 만일을 위해서다.
채서담은 합리화를 끝낸 후 안타깝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현아, …너 내가 그렇게 싫니?”
“…….”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마찰이 좀 있었지만… 이럴 정도는 아니잖아, 혹시 나한테 수석 밀렸었다고 이러는… 거야? 너무 당혹스럽네.”
변명하며 당혹스러워하는 그림을 기대하며 말을 꺼냈다면 오산이다.
“내가 이미지가 나쁘니까, 재밌게 생각해서 그런 건가 싶어서 자괴감도 들어….”
그는 자신의 녹음기를 의식하며, 증거물 제작에 열을….
“서담아.”
그러나 선아현은, 미동도 없었다.
“이제 그런 건 안 통해.”
“…!!”
“나는 정말, 공표할 생각도 있어. 미리… 말해두는 게 내 마지막 정리일 것 같아서, 알리러 온 거였어.”
“…….”
“그럼, 들어가 볼게.”
선아현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단단한 표정으로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채서담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렸다.
* * *
‘터뜨릴 리가 없어.’
채서담은 숙소 침대에 누워 되뇌었다.
그냥 자기 위치에 재미 들려서 협박 좀 해보겠다고 꺼낸 말일 것이다.
‘그 찌질한 새끼가 X나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러나 한편으론, 만일 선아현이 녹음본을 공개했을 때 어떤 파장이 있을지를 계속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된다.
‘…지금이라도 사과해?’
아니, 사과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절대 사과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과할 만큼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멘탈이 약한 쪽이 혼자 무너질 걸 좀 부추긴 걸로 엄청난 피해자라도 된 양 구는 게 지긋지긋했다.
“X발….”
어떻게 될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그러나 제스처를 취하는 순간, 제 발 저린 것이 된다.
‘무시하고 가?’
하지만 찝찝했다. 끝없이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불안하고 미친 듯이 긴 며칠이 지났을 때.
마침내 변화가 생겼다.
“서담아, 음… 회사에서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
“……예.”
X발! X발!
채서담은 직감했다. 매니저 표정을 봐선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건 선아현 그 새끼가 기어코 일을 친 것이다.
“…!”
그렇지!
그 순간,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채서담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박문대가 자신을 괴롭혔다는 증거를 먼저 잡으면, 선아현이 혹시 폭로하더라도 그걸로 회사와 딜을 할 수 있지 않나?
그는 매니저의 안내로 복도 끝 매니지먼트실을 찾아가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지금이라도 문자를 해서 좀 긁어보면….’
달칵.
하지만 녹음기 소지 유무 확인 후, 매니지먼트실의 상담용 회의실 문이 열렸을 때.
“왔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영이었다.
박문대.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실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은 박문대는 무심히 채서담을 훑어본 다음 턱짓했다.
“앉으세요.”
“…….”
“아, 저는 실장님 대리입니다.”
툭.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린 박문대는 매니저에 의해 닫히는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픽 웃었다.
“대화 좀 하시죠.”
…그때야, 채서담은 박문대를 얕보며 잊었던 의심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박문대를 염탐하려 했던 이유.
복수심.
-운 좋은 새끼.
박문대의 그 발언 이후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폭로가, 혹시 박문대의 행위가 아닌가 했던… 의심을.
* * *
나는 고개를 들어 문 열고 들어온 놈을 확인했다.
채서담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잘됐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일수록 해 먹기 편했다. 안 그래도 쉬운 놈이 더 쉬워지겠군.
나는 아직도 서 있는 놈에게 말했다.
“안 앉으실 건가요.”
“…….”
“상관은 없는데… 그러면 그냥 이야기합니다.”
나는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학교폭력 관련해서 제보가 들어왔다는데….”
“다 네 짓이지?”
“뭐가요.”
“…….”
그러나 이 새끼는 대답하는 대신, 뭔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제야 의자를 빼서 거기 앉는다.
‘오.’
놈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뭐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 뭐가 터져서 이거 그만둬도 상관없어요, 선배님. 이미 충분히 욕먹어봤고… 길이 뭐 이거 하나인 것도 아니고, 그렇죠?”
“…….”
“그래. 그냥 아이돌 그만둘 거니까, 다 이야기하고 나가려고요. 어? 선배 그룹이 다 같이 짜고, 회사까지 같이 사람 압박해서 루머 만들었다고요.”
음, 전형적인 반응이다.
‘궁지에 몰렸으니 다 같이 죽자. 내가 자폭하겠다’ 이거지.
‘만일의 경우엔 다시 전공 업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건가.’
이 새끼도 대가리가 있으니 짐작했겠지만, 테스타 입장에서 나든 선아현이든 어느 쪽 사안을 터뜨려도 손해는 맞다.
‘그걸 피하려고 내가 계속 신중했던 거고.’
그러니 이러면 이제 협박이 가시고 협상 단계로 접어들 줄 알았나 보다.
“그러시구나.”
안됐지만 쓸모없는 짓이다.
너랑 협상은 없다.
“근데 아이돌 그만두면 유학 가실 생각인가요.”
“무슨 말…….”
“한국에서 당장 살긴 힘들 것 같아서요.”
나는 턱을 괸 채 채서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사실관계 다 까발려서 너 한국에선 더는 사회생활 못 할 만큼 구설수 만들 건데.”
“……!”
“나도 상관없어. 터지든 말든. 그런다고 테스타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녹음 같은 개소리 할 때부터 관계자끼리 이야기 다 끝났다고, 멍청아.”
이런 새끼를 믿을 구석이 싹 빠진 패닉 상태로 몰아넣을 방법.
바로 진심이 담긴 블러핑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93화
아직 그룹명이 정해지지 않은 그룹- 시즌 5 데뷔 조의 최근 일정은 제법 빡빡했다.
데뷔 준비와 동시에 광고, 인터뷰 등 오디션 프로그램 승자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화제성은 이전 남자 시즌 테스타의 위상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긴 충분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 승리감을 느끼는 구성원도 있었다.
‘연락도 못 해? X나 웃기네.’
채서담은 자신의 스마트폰 속, 아무 반응 없는 한 연락처를 확인했다.
전에 테스타 담당이던 매니저를 슬슬 구슬려 알아낸 번호였다. ‘형님, 형님’거리며 찌질한 놈 띄워주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그 수준에 가오 잡아도 본성이 그렇지.’
채서담은 박문대도 비슷한 부류일 것이라 짐작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말도 못 붙이던 부적응 종자가, 자신이 인기 아이돌이 됐다는 것에 취해서 세게 나오는 걸 보는 게 수치심이 들 정도였다.
‘운 좋은 새끼가 뭐 어째?’
말만 들어서는 무슨 대단히 자기가 봐준다는 투였는데, 결국 있어 보이는 척 그 이상은 없던 것이다.
지금도 채서담 자신이 슬쩍슬쩍 관련 인터뷰나 촬영 때마다 박문대를 들먹이는데도 어떤 반응도 못 하지 않는가.
분명 지레 겁먹은 것이다.
‘빡쳐서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무서워서 못 하는 것 좀 봐.’
그러고 머릿속에서는 자기를 무슨 만화 주인공쯤으로 미화하고 있을 꼴이 뻔했다. 반마다 한둘씩 그 덜떨어지는 놈들 있지 않은가.
‘진짜 운 좋은 게 어디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어.’
그냥 시기와 목 하나 잘 타고 나서 성공한 놈이 이토록 치열히 살아온 자신 같은 서열에게 갑질할 수 있는 게 웃길 뿐이다.
발이 부서져라 연습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리하게 상황을 헤쳐온 자신에게 채서담은 직접 리스펙을 보냈다.
잠시 방심하여 미끄러졌으나 그걸로 끝이다.
‘이젠 그렇게 안 둔다, 내가.’
이대로 박문대를 이용해 한계의 한계까지 그 인지도와 이미지로 이득을 본 후엔, 더 짜릿한 계획이 남아 있었다.
박문대와 다시 마주치는 순간, 못 참고 직접 폭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을 끌어내는 건 그의 특기였으니까.
‘기왕이면 회사에도 일러바치면 더 좋겠다.’
회사에서 덮으려고 하면 그것도 좋은 정황이었다. 그럼 그걸 잘 끌어모아다가 다시 약점으로 삼는다.
‘여차하면 그걸 내가 괴롭힘당했다는 증거로 써서 빠져나갈 수 있어.’
이러면 이미지의 반전까지 일석이조였다.
‘이미 즉석에서 삭제한 녹음본을 핑계로 후배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아이돌!’
“아.”
뒤집힐 상황이 생각만 해도 그럴싸해서 채서담은 만족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는 당시에는 흥분해서 미처 생각을 못 했던 녹음의 또 다른 당사자, 청려에 대한 것도 잠시 떠올렸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것도 다 자신의 계산 내였다고 합리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제스처를 보일 리가 없었다.
‘다 그렇다니까?’
자신에겐 피해가 없으니 박문대가 곤란한 걸 반기고 있을 것이라 채서담은 확신했다. 하하 호호 해도 경쟁자 아닌가.
알아보니 데뷔하자마자 잘된 아이돌이던데 얼마나 성격이 유아적일지 충분히 예상이 갔다.
‘오히려 딜 걸려고 내 쪽에 연락 줄 수도 있어.’
자신은 그 상황에서 저자세로 충분히 예의 바르게 굴었으니 감정 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박문대의 약점이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음~”
채서담은 이 눈덩이 굴리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논리를 생각하며, 지난 며칠간의 초조함을 깨끗이 버렸다.
‘대담하게 판 잘 짰어.’
삶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아온 오만함이 다시 자라났다.
그리고 이 낙관론이 깨진 것은 며칠 후, 회사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때였다.
이제 선배가 된 그의 동기, 선아현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세요…!”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선아현은 학교 다닐 때와 달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런 놈에게 연차가 밀려서 선배 취급을 해야 한다니.
채서담은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가 운 좋게 잘되지 않았으면 사회생활도 못 했을 게.’
저런 인간이 마치 자신보다 성공한 것처럼 들먹거리는 것은 언제나 부조리의 쓴맛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네가 뭘 어쩔 건데?’
선배라고 유세 부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겨우 만든 사회적 위치를 신경 쓴다면 말이다.
그리고 채서담은 선아현의 유세 정도는… 솔직히 간지럽지도 않았다.
“저, 서담 씨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아, 넵! 서담 형!”
아득바득 말 안 더듬으려는 꼴이 좀 배알이 꼴리긴 했으나, 그는 굳이 자신을 지목해 불러내는 선아현의 행태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녹음기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약점이 하나 더 생기겠네.’
그러나 채서담은 구석의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선아현의 직구를 맞는다.
“많이, 고민 중이야…. 네가 날 괴롭혔다고 사실대로 밝혀야 할지.”
“……!”
뭘 밝힌다고?
채서담은 순간 이게 현실인지 돌아보았다.
그러나 선아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서담아, 나 녹음 있어.”
“……!”
“네가, 너무 무서워서…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해서, 다시 들어보고 이해해 보려고, 녹음을 했었어… 한동안.”
“…….”
“그리고, 아직 남아 있어.”
채서담은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위기 앞에서 느끼는 생존본능이었다.
‘아, 아니지.’
채서담은 겨우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성적이라 착각하며 합리화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왔던 것을 비슷하게, 그러나 좀 더 강하게.
‘저렇게 말해도 못 터뜨릴 거라니까?’
터뜨리면 자기도 손해 아닌가? 지금 저렇게 잘나가는 아이돌인데 말이다.
겨우 학교 다닐 때 기분 나빠서 실기 좀 망친 것 가지고 학교폭력으로 나불대긴 힘들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뭘 녹음했는데?’
그가 생각하기엔, 아무리 따져도 자신은 책잡힐 만큼 폭언을 하거나 때린 적이 없었다.
저건 그냥 겁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니… 그래, 만일을 위해서다.
채서담은 합리화를 끝낸 후 안타깝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현아, …너 내가 그렇게 싫니?”
“…….”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마찰이 좀 있었지만… 이럴 정도는 아니잖아, 혹시 나한테 수석 밀렸었다고 이러는… 거야? 너무 당혹스럽네.”
변명하며 당혹스러워하는 그림을 기대하며 말을 꺼냈다면 오산이다.
“내가 이미지가 나쁘니까, 재밌게 생각해서 그런 건가 싶어서 자괴감도 들어….”
그는 자신의 녹음기를 의식하며, 증거물 제작에 열을….
“서담아.”
그러나 선아현은, 미동도 없었다.
“이제 그런 건 안 통해.”
“…!!”
“나는 정말, 공표할 생각도 있어. 미리… 말해두는 게 내 마지막 정리일 것 같아서, 알리러 온 거였어.”
“…….”
“그럼, 들어가 볼게.”
선아현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단단한 표정으로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그리고 채서담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렸다.
* * *
‘터뜨릴 리가 없어.’
채서담은 숙소 침대에 누워 되뇌었다.
그냥 자기 위치에 재미 들려서 협박 좀 해보겠다고 꺼낸 말일 것이다.
‘그 찌질한 새끼가 X나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그러나 한편으론, 만일 선아현이 녹음본을 공개했을 때 어떤 파장이 있을지를 계속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며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된다.
‘…지금이라도 사과해?’
아니, 사과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절대 사과할 수 없었다…. 애초에, 사과할 만큼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멘탈이 약한 쪽이 혼자 무너질 걸 좀 부추긴 걸로 엄청난 피해자라도 된 양 구는 게 지긋지긋했다.
“X발….”
어떻게 될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그러나 제스처를 취하는 순간, 제 발 저린 것이 된다.
‘무시하고 가?’
하지만 찝찝했다. 끝없이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불안하고 미친 듯이 긴 며칠이 지났을 때.
마침내 변화가 생겼다.
“서담아, 음… 회사에서 매니지먼트 실장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
“……예.”
X발! X발!
채서담은 직감했다. 매니저 표정을 봐선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건 선아현 그 새끼가 기어코 일을 친 것이다.
“…!”
그렇지!
그 순간,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채서담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박문대가 자신을 괴롭혔다는 증거를 먼저 잡으면, 선아현이 혹시 폭로하더라도 그걸로 회사와 딜을 할 수 있지 않나?
그는 매니저의 안내로 복도 끝 매니지먼트실을 찾아가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지금이라도 문자를 해서 좀 긁어보면….’
달칵.
하지만 녹음기 소지 유무 확인 후, 매니지먼트실의 상담용 회의실 문이 열렸을 때.
“왔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영이었다.
박문대.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실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앉은 박문대는 무심히 채서담을 훑어본 다음 턱짓했다.
“앉으세요.”
“…….”
“아, 저는 실장님 대리입니다.”
툭.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린 박문대는 매니저에 의해 닫히는 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픽 웃었다.
“대화 좀 하시죠.”
…그때야, 채서담은 박문대를 얕보며 잊었던 의심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박문대를 염탐하려 했던 이유.
복수심.
-운 좋은 새끼.
박문대의 그 발언 이후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과 폭로가, 혹시 박문대의 행위가 아닌가 했던… 의심을.
* * *
나는 고개를 들어 문 열고 들어온 놈을 확인했다.
채서담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잘됐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일수록 해 먹기 편했다. 안 그래도 쉬운 놈이 더 쉬워지겠군.
나는 아직도 서 있는 놈에게 말했다.
“안 앉으실 건가요.”
“…….”
“상관은 없는데… 그러면 그냥 이야기합니다.”
나는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학교폭력 관련해서 제보가 들어왔다는데….”
“다 네 짓이지?”
“뭐가요.”
“…….”
그러나 이 새끼는 대답하는 대신, 뭔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제야 의자를 빼서 거기 앉는다.
‘오.’
놈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뭐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 뭐가 터져서 이거 그만둬도 상관없어요, 선배님. 이미 충분히 욕먹어봤고… 길이 뭐 이거 하나인 것도 아니고, 그렇죠?”
“…….”
“그래. 그냥 아이돌 그만둘 거니까, 다 이야기하고 나가려고요. 어? 선배 그룹이 다 같이 짜고, 회사까지 같이 사람 압박해서 루머 만들었다고요.”
음, 전형적인 반응이다.
‘궁지에 몰렸으니 다 같이 죽자. 내가 자폭하겠다’ 이거지.
‘만일의 경우엔 다시 전공 업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건가.’
이 새끼도 대가리가 있으니 짐작했겠지만, 테스타 입장에서 나든 선아현이든 어느 쪽 사안을 터뜨려도 손해는 맞다.
‘그걸 피하려고 내가 계속 신중했던 거고.’
그러니 이러면 이제 협박이 가시고 협상 단계로 접어들 줄 알았나 보다.
“그러시구나.”
안됐지만 쓸모없는 짓이다.
너랑 협상은 없다.
“근데 아이돌 그만두면 유학 가실 생각인가요.”
“무슨 말…….”
“한국에서 당장 살긴 힘들 것 같아서요.”
나는 턱을 괸 채 채서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든 사실관계 다 까발려서 너 한국에선 더는 사회생활 못 할 만큼 구설수 만들 건데.”
“……!”
“나도 상관없어. 터지든 말든. 그런다고 테스타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녹음 같은 개소리 할 때부터 관계자끼리 이야기 다 끝났다고, 멍청아.”
이런 새끼를 믿을 구석이 싹 빠진 패닉 상태로 몰아넣을 방법.
바로 진심이 담긴 블러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