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280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80화
봉쇄된 시야와 후각 속에 혼자….
머릿속에 앞뒤 없는 상념이 오간다.
‘혼자.’
혼자 살아야만 한다는 건 모든 것을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계약, 신고, 납부, 연체까지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행동과 실수에 대한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
내 판단과 행동으로 생기는 위험과 고통은 전부 나의 것이다.
누구와도 분담할 수 없다. 나에겐 옵션이 없으니까.
‘괜찮아.’
그러나 이런 건 몇 년 지나면 익숙해진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X 같거나 버거운 일이 생겨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뜻이다.
‘할 만했어.’
하지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은…, 대처할 수 없는 상황도 살다 보면 오지 않나?
‘영원히 안 온다고 장담할 수 없어.’
부모님한테 일어났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화재가 일어난다면.
그때 하필 내가 자고 있거나, 다치거나 아픈 상태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라면?
‘구멍이 너무 많아.’
내가 방심하면 죽는 것이다.
뚝.
식은땀이 발에 떨어졌… 아니, 신발 위에 떨어진 액체 한 방울을 이렇게 무겁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현실인가?’
냄새가 매캐하다.
그러나 확인하려고 해도, 보이는 게 없….
“박문대!”
갑자기, 정적을 가르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깨에 무언가가 올라왔다. …손인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다.
“괜찮아? 일단 멈춰 봐.”
내가 걷고 있었나?
“예.”
반사적으로 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한 번 심호흡하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불이 난 것 같았는데….”
“그러게, 탈출 제한 시간이 가까워져서 효과가 생긴 것 같아.”
효과.
‘그렇지.’
마지막에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건물 붕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통로 모서리로부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상구의 푸른 빛이다.
“아.”
나는 이미 가장 어두운 암전 구간을 걸어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냥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트인 귀에서 그제야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좀비 소리, 그리고 인위적인 붕괴음이 들린다.
“혼자 가다가 놀랐겠다. 따라오길 잘했네.”
그리고 손의 주인은 머쓱하게 웃고 있는 류청우였다. 레이저 건을 들고 있는 놈은 순식간에 나를 쫓아온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네. 든든하네요.”
쓸데없는 상념이 가신다.
‘촬영 중에 이게 무슨 바보짓이냐.’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다. 여기선 머릿수가 나 하나가 아니니까.
“그래.”
류청우는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것 같더니, 곧 가볍게 내 등을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할 거라면 무기가 있는 편이 낫잖아. 같이 가자.”
“그렇죠. 감사합니다.”
더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는 잠깐 내가 상념 따위에 속느라 낭비한 시간을 떠올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류청우가 바로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게?”
“환풍구가 있던 방이요.”
“아, 이 레이저 건 발견한 방. 거길 다시 찾아보게?”
“아니요.”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걸로 처음 방으로 돌아가려고요.”
“…거긴 왜?”
“시작 방에는 아무 트릭이 없었으니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환풍구를 찾아서 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마저도 제작진이 가리는 식의 어설픈 구성. 그건 이 연구소에서 애초에 운영하던 커리큘럼도 아니다.
‘그 공간에도 트릭이 있어야 구성이 맞아.’
나와 류청우는 좀비 시체를 열연 중인 연기자를 지나, 비상구를 통해 계단을 이동했다.
이 위가 바로 그 방이다.
나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 뒷문에서 ‘통행증’이란 단어를 봤을 때, 신분증을 제일 먼저 떠올렸습니다.”
“신분증?”
“예. 이런 연구소의 출입증은 ID 카드 같은 걸 떠올리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만난 분들은 다들 카드를 목에 안 걸고 있었죠.”
나는 그룹 면담 당시를 떠올렸다.
면담을 진행하는 전문가의 목이든 가슴이든 끈은 없었다.
“그렇다면, 옷 주머니에 넣어 다니시지 않았을까요.”
“…!”
그리고 우리는 진행 중에 하나의 옷을 아주 인상 깊게 보게 되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마네킹을 지나 환풍구에 올랐다.
미리 캐비닛을 치워둔 덕에 시체를 열연 중인 연기자만 조심히 넘으면 됐다.
그리고 떠올렸다.
이 컨텐츠가 심리 테스트에서 좀비 탈출로 장르가 바뀐, 제일 첫 번째 신호탄을.
-어억!
“그때 상담 진행하던 분이 복도로 넘어지면서, 흰 가운이 문에 걸렸죠.”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그걸 대단히 충격적으로 집중한 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그 가운이 거기 걸린 걸 보여준 건… 거기에 가장 중요한 정답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나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환풍구 끝에 도착해 발을 내렸다.
‘보인다.’
바로 맞은편에, 제일 처음 내려간 철문의 아래에 깔린 가운이.
나는 바로 달려가서 자세를 낮추고 흰 가운을 뒤졌다.
앞 포켓의 천 위로 사각형의 플라스틱이 만져진다.
‘그렇지.’
나는 웃었다.
“통행증은 계속 여기 있었어요.”
그리고 포켓에서 당사자의 얼굴과 직위가 찍힌 ID 카드를 꺼냈다.
뒷면에 굳이 선명히, ‘통행증 겸용’이라는 작은 글씨까지 적어둔 것이 보인다.
“역시 문대가 머리가 좋네.”
류청우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ID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별로 그런 건 아닌….”
철컥.
“……?”
눈앞에 레이저 건의 총구가 들이닥친다.
류청우가 들고 있던, 아니, 지금도 들고 있는 그 레이저 건.
‘뭐야.’
나는 눈만 움직여서 류청우를 올려보았다.
놈은 약간 난감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ID 카드 나 줘야겠다. 문대야.”
“…….”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논리를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있든, 형한테 있든, 어차피 뒷문에서 문을 여는 건 똑같을 텐데요.”
“아니. 우리가 목적이 다르거든.”
류청우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는 탈출. 나는 저지.”
“…!!”
“음… 말하자면, 내가 악당이야. 그렇게 됐어.”
아니 무슨 개소리야.
‘지금까지 제일 탈출에 기여도가 컸던 놈이?’
저 사격 솜씨 덕분에 우리가 얻은 이득이… 잠깐.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류청우의 행적이 지나간다.
-미안한데 캐비닛 좀 약간만 당겨 줄래? 머리를 쏠게.
저놈, 레이저 건의 배터리를 환풍구의 좀비에게 두 발 낭비했다.
본인이 직접 지원해서 아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팔을 쐈었다.
그리고 쏠 필요 없는 구간에서도 사격 여부를 언제나 물어봤지.
‘그래서 굳이 쏠 필요 없는 구간에서도 시간을 낭비….’
애초에 이 연구소의 탈출 루트는, 무기를 쓰지 않고 은밀 기동으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이 새끼가 총을 잡아서 좋았던 건 마음의 안정과 시간 낭비 외에는 없다.
‘와….’
이거 완전히 낚였군.
나는 제작진에게 혀를 내두르며, 류청우를 쳐다보았다.
‘왜 선정된 건지, 백그라운드 스토리는 어떤 건지 이야기 들어볼 시간은?’
없다. 그건 인터뷰로 넣으라고 해.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거 좀비한테만 통하는 걸 텐데요.”
류청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이용 설명서에 겸용이라고 적혀 있었거든.”
“아.”
저게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다. 가능성만으로도 총의 위력은 충분했다.
맞으면 아웃이고, 그럼 이 이상 탈출 가능성이 없지.
이대로 류청우가 ID 카드를 가지고 잠적하면 그만이니까.
‘빡세네.’
지금 몇 분 남았지?
마침 이곳에는 대형 화면에서 시간 카운트다운이 있다.
[00:05:19]
…엔딩에서 제일 몰입할 수 있는 멋진 동선 짜임이군.
‘5분.’
아슬아슬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올렸다.
“……잠시만요. 카드 꺼내겠습니다.”
“그래.”
나는 손을 코트의 가장 큰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물건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빼내서 류청우에게 겨누었다.
“…!”
“잘됐네요. 사람한테도 통한다니까.”
바로 레이저 건이다.
내가 그 좀비로 생을 마감한 보안 담당자의 손에서 빼냈던, 맨 처음 발견한 레이저 건.
류청우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배터리가….”
“있어요.”
다들 류청우가 12발 여유 있는 레이저 건을 챙기니, 무의식중에 이쪽은 없다 생각하고 넘어가던데.
아니다.
나는 확인했거든.
“딱 한 발 남았더라구요.”
눈금이 딱 한 번 쏠 만큼 남아 있었다.
사회복무긴 했다만, 그래도 훈련소라도 다녀온 놈이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챙기고 있었다.
이제 와서 쥐어보니, 진짜와 그닥 안 비슷해서 큰 의미는 없을 것 같긴 하다만.
‘진행하며서 총이 두 자루나 필요가 없었으니까.’
류청우만으로 충분하니, 관심이 옅어진 것이다.
“으음.”
류청우는 골치 아프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말려들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곧,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대야. 그런데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어도 어차피 ID 카드는 못 쓰는 거 아니야? 뒷문에 못 가지고 가잖아.”
“…!”
“그럼 이것도 별 의미 없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꺼내자마자 쏴 버렸어야 했구나.’
혹시 저 말이 거짓말이면 개싸움 돼서 아이돌 자체 컨텐츠답지 않아질까 봐 우려했던 건데, 류청우 성격에 그런 걸 거짓말할 놈이 아닌 걸 깜박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쏴?’
저 새끼보다 일찍 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리고 저놈은 남은 게 두 발이라 말이다.
고민할 순간이었다.
터더덩!
“문대 형! 청우 형!”
“…!”
맞은편 환풍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급히 열렸다.
그리고 쾌활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제가 맞았어요! 여기 있어요!”
“오~ 진짜!”
“저, 저기, 저희 왔…….”
환풍구를 기어 나오며 해맑게 손을 흔들려던 놈들은 상황을 보고 얼어붙었다.
“어어어.”
서로 레이저 건을 겨눈 멤버 둘.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희 여기까진 왜….”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당연히 너 혼자 달려가는데 쫓아오게 되지!”
“맞아요!”
“으응, 걱정되니까….”
나는 어쩐지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놈들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설명을 못 하니까 혼자 뛰었는데.’
그럼… 그때 그냥 설명 없이 뛰라고 해도 따라올 거였나.
‘그래. 그리고 그게 촬영 그림도 더 좋았을 거야.’
내면의 소리가 자기 멋대로 답변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버릇 고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겠군.’
다만 혼자 진지한 놈도 있다. 김래빈은 동공을 떨며 나와 류청우를 번갈아 보았다.
“탈출까지 운명 공동체로 가야 할 저희 팀에 내부 분열이….”
“…….”
오해부터 풀어줘야겠는데.
나는 당장 입을 열었다.
“방금 이 가운에서 통행증 찾았는데, 청우 형이 뺏으려고 하더라고. 사실 스파이였대.”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ID 카드를 꺼내서 흔들었다.
“대박!”
“허어억! 청우 형께서!”
“역시! 가운에 있었… 아니, 그럼 지금 쟤를 제압해야 하는 거잖아!”
순식간에 또 분위기가 반전된다.
그리고 쪽수가 많아졌으니, 이긴 거나 다름없다.
‘남은 4분으로 탈출까지 충분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약간 싸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놈들이 내 말을 무조건 믿을 필요가 있나? 총을 든 둘이 서로 겨누고 있는 상황에?
심지어 그동안 나서지 않던 내가 총을 든 게 더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류청우가 반대로 내가 뒤통수를 갈기려고 했고 본인이 막는 중이라고 하면….’
“하하.”
…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류청우 표정을 보니 ‘들켰네’라고 적혀 있다.
하긴 그런 방식을 쓰느니 질 놈이긴 했다.
“으음. 이건 안 되겠네. 항복할게.”
류청우는 약간 기특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레이저 건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우와아아!”
멤버들은 당장 달려와서 류청우의 레이저 건을 회수하며 감탄과 비명을 질렀다. 막판의 반전이 짜릿했던 모양이다.
“우리 탈출한다!”
“아니, 일단 달려야 하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류청우를 장난스럽게 협박하며 뒷문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ID 카드는….
-띠릭.
“열린다!”
“좋았어…!”
성공적으로 통했다. 나는 어깨동무를 하는 놈들과 함께 야외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이 훅 얼굴에 끼쳤다.
“29초 남기고 탈출 성공!”
“우리 미쳤다!”
나는 순순히 놈들의 세레머니에 어울렸다. 솔직히, 시원했다.
그렇게 한동안 비하인드와 겪은 일에 대해 떠들고 난 후.
“아~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으으! 정말!”
다시 만난 제작진들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게다가 열받은 우리까지 찍어가려는지 카메라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대단한 놈들이다.
“청우 형 배신하게 만든 건 누구세요? 우리 리더 형한테 너무 한 건 아니에요~?”
“아니, 청우 씨도 재밌어했다니까요??”
“하하, 아닌데요.”
“청우 씨 이렇게 배신을!”
몇 분간의 장난스럽고 웃긴 성토가 이어졌고, 본론도 나왔다.
“그래서 우리 룸메이트 누구예요??”
“음, 그러게요. 어떻게 결정되는 건지 궁금한데요?”
그래, 원래 이 난리의 목적이 그거였지. 우리는 적절한 대답을 기다리며 제작진을 쳐다보았다.
“그건….”
PD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1화 본방 시청하시면서 같이 확인해 주세요~”
“아 진짜!!”
그렇게 테스타는 마지막까지 제작진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재밌었으니, 넘어가 주겠다.
* * *
테스타가 우여곡절 끝에 해당 촬영을 끝낸 며칠 후.
팬들은 위튜브에 다짜고짜 올라온 팬서비스용 영상을 확인했다.
다만 룸메이트 시리즈치고는 상당히 비범했다.
[“심리 테스트라며! 상담이라며!” 미안하다, 페이크야! 4탄은 좀비로 물든다…☆ Season 4 ep.1]
썸네일은 비명을 지르는 김래빈과 큰세진이다.
“…??”
알림을 보고 위튜브에 접속했던 대학원생은 잠깐 당황해서 그것을 보다가, 곧 폭소를 터뜨리며 제목을 클릭하게 되었다.
“하하!!”
기대감에 심장이 부풀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80화
봉쇄된 시야와 후각 속에 혼자….
머릿속에 앞뒤 없는 상념이 오간다.
‘혼자.’
혼자 살아야만 한다는 건 모든 것을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계약, 신고, 납부, 연체까지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행동과 실수에 대한 책임은 다 나에게 있다.
내 판단과 행동으로 생기는 위험과 고통은 전부 나의 것이다.
누구와도 분담할 수 없다. 나에겐 옵션이 없으니까.
‘괜찮아.’
그러나 이런 건 몇 년 지나면 익숙해진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X 같거나 버거운 일이 생겨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뜻이다.
‘할 만했어.’
하지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은…, 대처할 수 없는 상황도 살다 보면 오지 않나?
‘영원히 안 온다고 장담할 수 없어.’
부모님한테 일어났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화재가 일어난다면.
그때 하필 내가 자고 있거나, 다치거나 아픈 상태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라면?
‘구멍이 너무 많아.’
내가 방심하면 죽는 것이다.
뚝.
식은땀이 발에 떨어졌… 아니, 신발 위에 떨어진 액체 한 방울을 이렇게 무겁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현실인가?’
냄새가 매캐하다.
그러나 확인하려고 해도, 보이는 게 없….
“박문대!”
갑자기, 정적을 가르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깨에 무언가가 올라왔다. …손인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다.
“괜찮아? 일단 멈춰 봐.”
내가 걷고 있었나?
“예.”
반사적으로 답이 튀어나왔다.
나는 한 번 심호흡하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불이 난 것 같았는데….”
“그러게, 탈출 제한 시간이 가까워져서 효과가 생긴 것 같아.”
효과.
‘그렇지.’
마지막에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건물 붕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통로 모서리로부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상구의 푸른 빛이다.
“아.”
나는 이미 가장 어두운 암전 구간을 걸어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냥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트인 귀에서 그제야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좀비 소리, 그리고 인위적인 붕괴음이 들린다.
“혼자 가다가 놀랐겠다. 따라오길 잘했네.”
그리고 손의 주인은 머쓱하게 웃고 있는 류청우였다. 레이저 건을 들고 있는 놈은 순식간에 나를 쫓아온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네. 든든하네요.”
쓸데없는 상념이 가신다.
‘촬영 중에 이게 무슨 바보짓이냐.’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다. 여기선 머릿수가 나 하나가 아니니까.
“그래.”
류청우는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것 같더니, 곧 가볍게 내 등을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할 거라면 무기가 있는 편이 낫잖아. 같이 가자.”
“그렇죠. 감사합니다.”
더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는 잠깐 내가 상념 따위에 속느라 낭비한 시간을 떠올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류청우가 바로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게?”
“환풍구가 있던 방이요.”
“아, 이 레이저 건 발견한 방. 거길 다시 찾아보게?”
“아니요.”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걸로 처음 방으로 돌아가려고요.”
“…거긴 왜?”
“시작 방에는 아무 트릭이 없었으니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환풍구를 찾아서 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마저도 제작진이 가리는 식의 어설픈 구성. 그건 이 연구소에서 애초에 운영하던 커리큘럼도 아니다.
‘그 공간에도 트릭이 있어야 구성이 맞아.’
나와 류청우는 좀비 시체를 열연 중인 연기자를 지나, 비상구를 통해 계단을 이동했다.
이 위가 바로 그 방이다.
나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 뒷문에서 ‘통행증’이란 단어를 봤을 때, 신분증을 제일 먼저 떠올렸습니다.”
“신분증?”
“예. 이런 연구소의 출입증은 ID 카드 같은 걸 떠올리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만난 분들은 다들 카드를 목에 안 걸고 있었죠.”
나는 그룹 면담 당시를 떠올렸다.
면담을 진행하는 전문가의 목이든 가슴이든 끈은 없었다.
“그렇다면, 옷 주머니에 넣어 다니시지 않았을까요.”
“…!”
그리고 우리는 진행 중에 하나의 옷을 아주 인상 깊게 보게 되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마네킹을 지나 환풍구에 올랐다.
미리 캐비닛을 치워둔 덕에 시체를 열연 중인 연기자만 조심히 넘으면 됐다.
그리고 떠올렸다.
이 컨텐츠가 심리 테스트에서 좀비 탈출로 장르가 바뀐, 제일 첫 번째 신호탄을.
-어억!
“그때 상담 진행하던 분이 복도로 넘어지면서, 흰 가운이 문에 걸렸죠.”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그걸 대단히 충격적으로 집중한 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그 가운이 거기 걸린 걸 보여준 건… 거기에 가장 중요한 정답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나는 거의 확신을 가지고, 환풍구 끝에 도착해 발을 내렸다.
‘보인다.’
바로 맞은편에, 제일 처음 내려간 철문의 아래에 깔린 가운이.
나는 바로 달려가서 자세를 낮추고 흰 가운을 뒤졌다.
앞 포켓의 천 위로 사각형의 플라스틱이 만져진다.
‘그렇지.’
나는 웃었다.
“통행증은 계속 여기 있었어요.”
그리고 포켓에서 당사자의 얼굴과 직위가 찍힌 ID 카드를 꺼냈다.
뒷면에 굳이 선명히, ‘통행증 겸용’이라는 작은 글씨까지 적어둔 것이 보인다.
“역시 문대가 머리가 좋네.”
류청우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ID 카드를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별로 그런 건 아닌….”
철컥.
“……?”
눈앞에 레이저 건의 총구가 들이닥친다.
류청우가 들고 있던, 아니, 지금도 들고 있는 그 레이저 건.
‘뭐야.’
나는 눈만 움직여서 류청우를 올려보았다.
놈은 약간 난감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ID 카드 나 줘야겠다. 문대야.”
“…….”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논리를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 있든, 형한테 있든, 어차피 뒷문에서 문을 여는 건 똑같을 텐데요.”
“아니. 우리가 목적이 다르거든.”
류청우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너희는 탈출. 나는 저지.”
“…!!”
“음… 말하자면, 내가 악당이야. 그렇게 됐어.”
아니 무슨 개소리야.
‘지금까지 제일 탈출에 기여도가 컸던 놈이?’
저 사격 솜씨 덕분에 우리가 얻은 이득이… 잠깐.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류청우의 행적이 지나간다.
-미안한데 캐비닛 좀 약간만 당겨 줄래? 머리를 쏠게.
저놈, 레이저 건의 배터리를 환풍구의 좀비에게 두 발 낭비했다.
본인이 직접 지원해서 아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팔을 쐈었다.
그리고 쏠 필요 없는 구간에서도 사격 여부를 언제나 물어봤지.
‘그래서 굳이 쏠 필요 없는 구간에서도 시간을 낭비….’
애초에 이 연구소의 탈출 루트는, 무기를 쓰지 않고 은밀 기동으로 이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이 새끼가 총을 잡아서 좋았던 건 마음의 안정과 시간 낭비 외에는 없다.
‘와….’
이거 완전히 낚였군.
나는 제작진에게 혀를 내두르며, 류청우를 쳐다보았다.
‘왜 선정된 건지, 백그라운드 스토리는 어떤 건지 이야기 들어볼 시간은?’
없다. 그건 인터뷰로 넣으라고 해.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거 좀비한테만 통하는 걸 텐데요.”
류청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이용 설명서에 겸용이라고 적혀 있었거든.”
“아.”
저게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다. 가능성만으로도 총의 위력은 충분했다.
맞으면 아웃이고, 그럼 이 이상 탈출 가능성이 없지.
이대로 류청우가 ID 카드를 가지고 잠적하면 그만이니까.
‘빡세네.’
지금 몇 분 남았지?
마침 이곳에는 대형 화면에서 시간 카운트다운이 있다.
…엔딩에서 제일 몰입할 수 있는 멋진 동선 짜임이군.
‘5분.’
아슬아슬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올렸다.
“……잠시만요. 카드 꺼내겠습니다.”
“그래.”
나는 손을 코트의 가장 큰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물건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빼내서 류청우에게 겨누었다.
“…!”
“잘됐네요. 사람한테도 통한다니까.”
바로 레이저 건이다.
내가 그 좀비로 생을 마감한 보안 담당자의 손에서 빼냈던, 맨 처음 발견한 레이저 건.
류청우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배터리가….”
“있어요.”
다들 류청우가 12발 여유 있는 레이저 건을 챙기니, 무의식중에 이쪽은 없다 생각하고 넘어가던데.
아니다.
나는 확인했거든.
“딱 한 발 남았더라구요.”
눈금이 딱 한 번 쏠 만큼 남아 있었다.
사회복무긴 했다만, 그래도 훈련소라도 다녀온 놈이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챙기고 있었다.
이제 와서 쥐어보니, 진짜와 그닥 안 비슷해서 큰 의미는 없을 것 같긴 하다만.
‘진행하며서 총이 두 자루나 필요가 없었으니까.’
류청우만으로 충분하니, 관심이 옅어진 것이다.
“으음.”
류청우는 골치 아프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말려들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곧,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대야. 그런데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어도 어차피 ID 카드는 못 쓰는 거 아니야? 뒷문에 못 가지고 가잖아.”
“…!”
“그럼 이것도 별 의미 없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꺼내자마자 쏴 버렸어야 했구나.’
혹시 저 말이 거짓말이면 개싸움 돼서 아이돌 자체 컨텐츠답지 않아질까 봐 우려했던 건데, 류청우 성격에 그런 걸 거짓말할 놈이 아닌 걸 깜박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쏴?’
저 새끼보다 일찍 쏠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그리고 저놈은 남은 게 두 발이라 말이다.
고민할 순간이었다.
터더덩!
“문대 형! 청우 형!”
“…!”
맞은편 환풍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급히 열렸다.
그리고 쾌활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제가 맞았어요! 여기 있어요!”
“오~ 진짜!”
“저, 저기, 저희 왔…….”
환풍구를 기어 나오며 해맑게 손을 흔들려던 놈들은 상황을 보고 얼어붙었다.
“어어어.”
서로 레이저 건을 겨눈 멤버 둘.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희 여기까진 왜….”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당연히 너 혼자 달려가는데 쫓아오게 되지!”
“맞아요!”
“으응, 걱정되니까….”
나는 어쩐지 한 대 맞은 기분으로 놈들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설명을 못 하니까 혼자 뛰었는데.’
그럼… 그때 그냥 설명 없이 뛰라고 해도 따라올 거였나.
‘그래. 그리고 그게 촬영 그림도 더 좋았을 거야.’
내면의 소리가 자기 멋대로 답변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버릇 고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겠군.’
다만 혼자 진지한 놈도 있다. 김래빈은 동공을 떨며 나와 류청우를 번갈아 보았다.
“탈출까지 운명 공동체로 가야 할 저희 팀에 내부 분열이….”
“…….”
오해부터 풀어줘야겠는데.
나는 당장 입을 열었다.
“방금 이 가운에서 통행증 찾았는데, 청우 형이 뺏으려고 하더라고. 사실 스파이였대.”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ID 카드를 꺼내서 흔들었다.
“대박!”
“허어억! 청우 형께서!”
“역시! 가운에 있었… 아니, 그럼 지금 쟤를 제압해야 하는 거잖아!”
순식간에 또 분위기가 반전된다.
그리고 쪽수가 많아졌으니, 이긴 거나 다름없다.
‘남은 4분으로 탈출까지 충분해.’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약간 싸한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놈들이 내 말을 무조건 믿을 필요가 있나? 총을 든 둘이 서로 겨누고 있는 상황에?
심지어 그동안 나서지 않던 내가 총을 든 게 더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류청우가 반대로 내가 뒤통수를 갈기려고 했고 본인이 막는 중이라고 하면….’
“하하.”
…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류청우 표정을 보니 ‘들켰네’라고 적혀 있다.
하긴 그런 방식을 쓰느니 질 놈이긴 했다.
“으음. 이건 안 되겠네. 항복할게.”
류청우는 약간 기특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레이저 건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우와아아!”
멤버들은 당장 달려와서 류청우의 레이저 건을 회수하며 감탄과 비명을 질렀다. 막판의 반전이 짜릿했던 모양이다.
“우리 탈출한다!”
“아니, 일단 달려야 하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류청우를 장난스럽게 협박하며 뒷문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의 ID 카드는….
-띠릭.
“열린다!”
“좋았어…!”
성공적으로 통했다. 나는 어깨동무를 하는 놈들과 함께 야외로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이 훅 얼굴에 끼쳤다.
“29초 남기고 탈출 성공!”
“우리 미쳤다!”
나는 순순히 놈들의 세레머니에 어울렸다. 솔직히, 시원했다.
그렇게 한동안 비하인드와 겪은 일에 대해 떠들고 난 후.
“아~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으으! 정말!”
다시 만난 제작진들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게다가 열받은 우리까지 찍어가려는지 카메라는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 대단한 놈들이다.
“청우 형 배신하게 만든 건 누구세요? 우리 리더 형한테 너무 한 건 아니에요~?”
“아니, 청우 씨도 재밌어했다니까요??”
“하하, 아닌데요.”
“청우 씨 이렇게 배신을!”
몇 분간의 장난스럽고 웃긴 성토가 이어졌고, 본론도 나왔다.
“그래서 우리 룸메이트 누구예요??”
“음, 그러게요. 어떻게 결정되는 건지 궁금한데요?”
그래, 원래 이 난리의 목적이 그거였지. 우리는 적절한 대답을 기다리며 제작진을 쳐다보았다.
“그건….”
PD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1화 본방 시청하시면서 같이 확인해 주세요~”
“아 진짜!!”
그렇게 테스타는 마지막까지 제작진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재밌었으니, 넘어가 주겠다.
* * *
테스타가 우여곡절 끝에 해당 촬영을 끝낸 며칠 후.
팬들은 위튜브에 다짜고짜 올라온 팬서비스용 영상을 확인했다.
다만 룸메이트 시리즈치고는 상당히 비범했다.
썸네일은 비명을 지르는 김래빈과 큰세진이다.
“…??”
알림을 보고 위튜브에 접속했던 대학원생은 잠깐 당황해서 그것을 보다가, 곧 폭소를 터뜨리며 제목을 클릭하게 되었다.
“하하!!”
기대감에 심장이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