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258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8화
“여러분! 마음 따뜻한 연말 보내는 중이신가요?”
“올 한 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던 뮤지션분들께서 다시 한번 멋진 무대를 준비 중이십니다.”
내 옆의 두 아이돌은 제법 진행을 잘했다.
‘연차 허투루 먹은 건 아니군.’
나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면 올해 가장 빛나는 활동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신 아티스트분들을 소개하는, 가요대전의 첫 번째 무대부터 만나보실까요?”
나만 문장이 유독 긴데 착각은 아닌 것 같다. 설마 연차 순으로 대본 짬 처리냐?
‘그리고 볼 찌르게 시킨 놈은 대체 누구야.’
포지션상 어쩔 순 없다만 굳이 이런 걸 대본에 지정까지 한다? 이 고의적 행동은 잊지 않겠다.
“SBC 가요대전, 지금 시작합니다!”
어쨌든 카메라는 돌아갔고, 세 명의 MC는 카메라를 보고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불이 꺼지는 순간 가볍게 숨을 쉬거나 표정을 다듬었다.
“휴우.”
“굿!”
반대편의 VTIC 놈은 굳이 손을 길게 뻗어 내 등을 두드렸다. 정말 필요 없는 선배 노릇이다.
“문대 씨, 완전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대본을 다시 체크하던 영린도 살짝 웃더니 말을 보탠다.
“여전히 열심히 하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연차가 이렇게까지 차이 나니 그냥 촬영 내내 감사봇이 되는 편이 나았다.
당장 우리가 있는 단상 바로 아래에도 응원봉 든 팬들이 있거든.
물론 카메라 렌즈도 몇 개 보인다.
‘잘 숨겼네.’
나는 낯익은 몇몇 사람이 든 카메라를 슬쩍 웃으며 쳐다보고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생방송이라 저런 건 유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이 무대 끝나면 이번 방송 주제 발표….’
나는 ‘축제를 즐기는 모두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더럽게 긴 대본을 한 번 더 숙지했다. 프롬프터에 나오긴 하지만 더듬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이돌 셋은 좀 무리수 아닌가.’
솔직히 이 라인업이면 화제성은 확실하겠다만, 진행 안정성만 생각하자면 중심 잡아줄 아나운서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말이다.
연기 대상이나 연예 대상처럼 시상하는 건 아니니 다들 그럭저럭 넘어가겠다는 계산인 건 안다. 그래도 꼬투리를 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와, 이거 진땀 나네요! 저희 자체 컨텐츠 같은 데서만 진행해 봤는데 갑자기 연말에 이런 걸 하게 될 줄이야! 진짜 열심히 할게요, 여러분.”
일단 제일 경력 긴 놈이 신인 같은 포부를 자랑하고 있고.
“문대 씨는 아직도 신인이니까 너무 긴장 마세요. 말하다 꼬이면 그냥 문장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어서 할게요.”
이쪽은 거의 전문 MC 같군. 여기저기서 사회 많이 보더니 준 진행자급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영린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실수가 없는 게 목표니까요. 잘해보겠습니다.”
영린이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신입사원 기특해하는 팀장이 따로 없다.
“그래요.”
“와! 아이돌 화이팅!”
대본 든 손으로 셋이 손 모아 화이팅까지 하니 좀 웃기긴 하다만, 대충 때우고 넘어가려는 놈이 없는 걸로 만족하자.
“올해의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국립국악단의 특별 무대, 어떠셨나요?”
“정말 멋졌습니다!”
“현란한 움직임이 마치 밝은 새해를 보여주시는 것 같아서 참 즐겁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1부 내내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좋아.’
[광고]
나는 1부가 끝나며 막간 광고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리액션용으로 조성해 둔 가수석에서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형 멋져요! 그거예요!”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이놈들아.’
음향과 응원석 소리가 얼마나 큰데 뭘 힘들게 말하냐.
어쨌든 응원은 고마우니 손은 흔들어주고, 다시 큐카드를 넘겼다.
‘이대로면 최소한 평타는 치겠어.’
중간에 VTIC 놈이 자화자찬 대본에 민망해할 뻔한 상황도 커버해 줬으니, 무능력자 낙하산 신인돌 이미지는 안 붙었겠지.
‘기사나 잘 떠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내려놓았다.
[2부 30초 전]
그리고, 2부 첫 무대가 끝나고, 중계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문대 씨!”
갑자기 불쑥 대본에도 없던 뜬금없는 게 튀어나왔다.
VTIC 채율이 불붙은 폭죽이 꽂힌 대형 컵케이크 하나를 내 눈앞에 들이댄 것이다.
“…??”
뭐야 이게.
“문대 씨가 며칠 전에 생일이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생일 축하합니다. 문대 씨.”
그리고 제작진이 카메라 밑에서 강아지 귀가 달린 고깔모자를 쓱 올린다.
“…….”
나는 황망하게 그것을 받아 썼다.
아니, 좀 사전에 말을 해달란 말이다, 방송국 놈들아. 생방송에 이게 무슨….
-스마일!
스케치북에 그런 건 적을 필요 없다. 안 그래도 입꼬리 찢어지게 웃고 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초 불어주세요!
가지가지 한다.
나는 활짝 웃으며 폭죽을 불어 껐다. 그리고 강아지 귀를 당겼다.
정장 입고 연말 프로그램 MC를 보면서 대국민 재롱을 떨게 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수석에서 포복절도하는 놈들이 보인다. 숙소 복귀해서 보자.
…잠깐.
‘그러고 보니 2부 오프닝 대본이….’
“다음 무대는 아름다운 생일에 관련된 곡인데요!”
“올해 여름을 빛낸 곡이죠?”
나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17년 차 밴드 그레이케이블의 ‘birthday boy’. 특별한 라이브 공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걸 위한 연출이었냐.
다음 곡 소개를 위해 존엄성이 사라지는 게 아이돌 MC냐고.
무슨 정규 음방도 아니고 연말 프로그램까지 계속되는 아이돌의 본분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이 기조는 엔딩까지 간다.
* * *
‘박문대 귀여워!!’
중계석 아래에서 카메라를 잡고 있던 박문대의 홈마는 기쁨으로 왈칵 울 뻔했다.
관계자에게서 문대가 연말에 MC를 본다는 소문 하나 듣고 이 근처를 잡은 보람이 넘쳤다!
‘이거지! 이거야!’
정말 오랜만에, 실물로 보는 박문대가 너무 좋았다….
박문대는 남색의 깔끔한 정장 아래 검은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는데, 잘 넘긴 머리와 어울리는 MC다운 차림이었다.
하지만 MC 중 막내랍시고 하얀 리본 타이를 했는데 그게 정말… 너무 귀여웠다!
특히 컵케이크를 받아 들 때!
깜짝 순서였는지, 박문대는 당황한 티가 역력해서 더 귀여웠다.
‘코에 크림 묻었어….’
확인하자마자 박문대가 닦아낸 뒤 관계자들이 정리까지 해줘 버렸지만, 홈마는 이미 그 컷을 잡았다.
‘하하하…! 하하하!’
오랜만에 온 오프라인 촬영에 완전히 들뜬 홈마는 내적 광소를 터뜨리며 미친 듯이 사진을 수집했다. 프리뷰는 너구나!
사고 이후, 극도의 우울한 시간과 롤러코스터처럼 미친 듯이 널뛰는 상황, 그리고 걱정 가득한 직후 활동 분위기를 경험하며 쌓인 피로가 날아갔다.
속이 후련하고 즐거웠다.
‘이번 활동 진짜 기대된다.’
제자리에 무사히 돌아온 느낌이 정말 좋았다. 홈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문대 컨디션도 좋아 보이고!’
가끔 멤버들이 가수석에서 박문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면, 카메라 불이 안 들어왔을 때는 슬쩍 마주 흔들어주는 모습이 좋았다.
게다가 박문대는 그 와중에 팬들의 카메라 렌즈까지 찾아낸 게 분명했다. 이 카메라에도 아이컨택을 했단 말이다!
‘평생 아이돌 하자….’
박문대야말로 그녀의 케이팝 인생에 내려온 정착지가 분명했다. 아무튼 그랬다.
‘환승? 그런 건 없다.’
전 아이돌의 사회면 진출을 보며, 다시는 아이돌을 믿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홈마의 쓰디쓴 음주 기억은 일련의 미친 사건들을 거치며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3부.
‘얘들 곧 하나 보다! 큐시트 맞았네.’
박문대가 성큼성큼 뛰어서 MC석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수석에서도 테스타가 이동하는 모습도 확인했다.
‘연말 프로그램은 공식 직캠을 잘 안 주니까…!’
홈마는 사명감을 가지고 카메라를 꾹 쥐었다.
더없이 뿌듯한 시간이었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귀갓길. 그녀는 흡족하게 SBC 상암홀을 빠져나오게 된다.
피로가 안 쌓였다. 아니, 지금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폭주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집에 돌아가면 피곤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문대의 홈마는 너무 행복했다.
“진짜 무대 너무 잘해.”
테스타는 전혀 기량이 줄지 않았다.
심지어 단 하나의 안무도 난이도를 조정하거나 삭제한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숙련도가 붙은 느낌이었어!’
교통사고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퇴원 직후, 단체 콘서트에서 잠깐 비틀거렸던 박문대도 오늘은 팔팔 날아다녔다.
완전히 무장이 완료되어 호승심으로 활활 불타는 것이 현장에서도, 카메라 렌즈 너머로도 느껴졌다.
물론 무대 자체의 구성도 좋았다. ‘Spring out’에서 사격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한 것은 화려하고, 연말에 맞게 웅장했다.
분명히 인터넷에서 제법 화제가 되었으리라 홈마는 짐작했다.
‘자… 이 부분만!’
그녀는 신나게 택시에 타서, 노트북에 카메라 용량을 연결해 촬영한 동영상을 조금 확인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을 꼭 다시 곱씹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영상을 배속으로 돌리던 때였다.
‘어?’
무대를 마치고 막 MC석으로 올라가는 박문대.
그 박문대의 검은 머리 아래로… 밝은 가닥이 보였다.
전율이 흘렀다.
“가발…!”
검은 머리는 스프레이든 가발이든, 아무튼 그건 가짜던 것이다.
박문대는… 또 흑발을 탈출했다!
‘미친! 이번 앨범 염색모야!’
이건 그녀가 흑발 박문대를 선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슨 색이지? 무슨 색이야? 조명 보정하면 색 좀 나오겠지?’
홈마는 이렇게 설레고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이 너무 간만인 탓이었다.
“하….”
홈마는 1월까지 자신이 스포일러를 참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며, 활동에 관련된 즐거운 가설들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캡처가 끝난 동영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큐시트를 점검하며 성공적으로 MC석에 복귀한 박문대.
그런데 다시 보니 그 모습이… 좀 이상했다.
“어어.”
그녀는 순간, 하던 상상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홈마는 당장 박문대의 상반신을 확대했다.
“…….”
각도 상 가수석으로 돌아가는 테스타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표정이 잠깐… 살벌하다?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지?’
홈마는 싸한 느낌에 몇 번 더 돌려봤지만, 박문대만 찍고 있던 덕에 박문대가 정확히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워낙 표정 관리가 빨리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으음.”
‘착각이겠지.’
겨우 몇 초 지나간 표정으로 이러는 것도 병이었다. 홈마는 애써 으쓱하며, 동영상을 넘겼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문대 MC 정말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형, 강아지 귀 생일선물… 아우!”
“그만해라.”
길고 긴 생방송이 끝났다.
합류하자마자 차로 이동했다. 바로 연습실로 가서 한두 시간 더 맞춰보고 들어갈 예정이었으니까.
‘MC는 괜찮았어.’
무대도 준비한 만큼은 퀄리티가 나왔으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다.
예상 못 했던 하나를 제외하면.
“모, 목 괜찮아?”
“…멀쩡해.”
“다행이다…!”
이놈 말이다. 선아현.
아까 무대 끝내고 복귀할 때 가수석을 봤는데, 분명 몇 놈들이 과하게 선아현에게 인사했단 말이지.
‘콜라보 무대 준비하는 놈들 같은데.’
거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그 후에 선아현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눅 든 것처럼.
“…….”
찝찝한데.
나는 연습실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놈 중 하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야.”
“어어? 문대 왜?”
큰세진이다.
이놈이 아까 입장할 때 선아현에게 인사하던 놈들을 은근슬쩍 끊는 걸 봤다.
‘이놈도 눈치챈 것 같은데.’
나는 목소리를 좀 낮춰서, 앞에서 걷는 놈들에게 들릴 여지를 차단했다.
그리고 바로 본론을 때렸다.
“너 가수석에서… 봤지. 선아현.”
“…음.”
큰세진은 무슨 말인지 즉시 이해한 것 같았다.
“그거.”
“그래, 뭐 본 거 있나? 콜라보하는 놈들로 보이던데.”
놈은 어깨를 으쓱했다.
“뻔하지 뭐. 아현이 박박 긁었겠지.”
“…!”
“아현이 애가 착하잖아. 막 이렇게~ 요령 좋은 타입이 아니니까 눌러보려는 거지.”
큰세진이 눈썹을 올렸다.
“그런 거 있잖아. ‘야~ 아현 씨는 카메라 되게 많이 받으시네. 부럽다~ 막, 연습 많이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좀 쪼개주고~”
“…….”
어찌나 잘 깐족거리는지 주둥이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지경이다.
그러나 큰세진의 말투는 금방 진지해졌다.
“거기다 친한 척해보려는 사람도 한둘이었겠어? 아현이 낯가리니까 또 그걸로 급 나눠서 사람 차별한다고 뒷담하고~ 그랬겠지 뭐.”
“……후.”
“이해 가지?”
“그래.”
서열질 한번 X 같이 하네.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이 새끼들이 때랑 다를 게 없다.
‘잘나가니까 벌벌 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나가는 놈이 만만해 보이면 더 지랄한다는 인간 본성을 깜박했다.
게다가 그룹에 이름값 좀 있는 놈들만 모아둬서 더 이겨 먹으려고 드는 것 같았다.
‘이건 이야기 좀 들어봐야겠는데.’
나는 연습실에 들어가기 전에 선아현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발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
저지당했다.
고개를 돌리니. 내 어깨를 잡은 큰세진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차차, 박문대, 설마 아현이한테 이런 거 떠들 건 아니지? 안 된다~”
“왜.”
“야,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큰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동갑 친구가 이 상황을 알아차리는 걸 참을 수 있겠냐? 친하니까 더 싫지 않겠어?”
“…!”
“아현이가 알아서 하게 둬. 그게 맞아.”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58화
“여러분! 마음 따뜻한 연말 보내는 중이신가요?”
“올 한 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던 뮤지션분들께서 다시 한번 멋진 무대를 준비 중이십니다.”
내 옆의 두 아이돌은 제법 진행을 잘했다.
‘연차 허투루 먹은 건 아니군.’
나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면 올해 가장 빛나는 활동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신 아티스트분들을 소개하는, 가요대전의 첫 번째 무대부터 만나보실까요?”
나만 문장이 유독 긴데 착각은 아닌 것 같다. 설마 연차 순으로 대본 짬 처리냐?
‘그리고 볼 찌르게 시킨 놈은 대체 누구야.’
포지션상 어쩔 순 없다만 굳이 이런 걸 대본에 지정까지 한다? 이 고의적 행동은 잊지 않겠다.
“SBC 가요대전, 지금 시작합니다!”
어쨌든 카메라는 돌아갔고, 세 명의 MC는 카메라를 보고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불이 꺼지는 순간 가볍게 숨을 쉬거나 표정을 다듬었다.
“휴우.”
“굿!”
반대편의 VTIC 놈은 굳이 손을 길게 뻗어 내 등을 두드렸다. 정말 필요 없는 선배 노릇이다.
“문대 씨, 완전 잘했어요!”
“감사합니다.”
대본을 다시 체크하던 영린도 살짝 웃더니 말을 보탠다.
“여전히 열심히 하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연차가 이렇게까지 차이 나니 그냥 촬영 내내 감사봇이 되는 편이 나았다.
당장 우리가 있는 단상 바로 아래에도 응원봉 든 팬들이 있거든.
물론 카메라 렌즈도 몇 개 보인다.
‘잘 숨겼네.’
나는 낯익은 몇몇 사람이 든 카메라를 슬쩍 웃으며 쳐다보고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생방송이라 저런 건 유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이 무대 끝나면 이번 방송 주제 발표….’
나는 ‘축제를 즐기는 모두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더럽게 긴 대본을 한 번 더 숙지했다. 프롬프터에 나오긴 하지만 더듬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이돌 셋은 좀 무리수 아닌가.’
솔직히 이 라인업이면 화제성은 확실하겠다만, 진행 안정성만 생각하자면 중심 잡아줄 아나운서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말이다.
연기 대상이나 연예 대상처럼 시상하는 건 아니니 다들 그럭저럭 넘어가겠다는 계산인 건 안다. 그래도 꼬투리를 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았다.
“와, 이거 진땀 나네요! 저희 자체 컨텐츠 같은 데서만 진행해 봤는데 갑자기 연말에 이런 걸 하게 될 줄이야! 진짜 열심히 할게요, 여러분.”
일단 제일 경력 긴 놈이 신인 같은 포부를 자랑하고 있고.
“문대 씨는 아직도 신인이니까 너무 긴장 마세요. 말하다 꼬이면 그냥 문장만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제가 이어서 할게요.”
이쪽은 거의 전문 MC 같군. 여기저기서 사회 많이 보더니 준 진행자급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영린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실수가 없는 게 목표니까요. 잘해보겠습니다.”
영린이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신입사원 기특해하는 팀장이 따로 없다.
“그래요.”
“와! 아이돌 화이팅!”
대본 든 손으로 셋이 손 모아 화이팅까지 하니 좀 웃기긴 하다만, 대충 때우고 넘어가려는 놈이 없는 걸로 만족하자.
“올해의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국립국악단의 특별 무대, 어떠셨나요?”
“정말 멋졌습니다!”
“현란한 움직임이 마치 밝은 새해를 보여주시는 것 같아서 참 즐겁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셋은 1부 내내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좋아.’
나는 1부가 끝나며 막간 광고가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리액션용으로 조성해 둔 가수석에서 손을 흔드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형 멋져요! 그거예요!”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이놈들아.’
음향과 응원석 소리가 얼마나 큰데 뭘 힘들게 말하냐.
어쨌든 응원은 고마우니 손은 흔들어주고, 다시 큐카드를 넘겼다.
‘이대로면 최소한 평타는 치겠어.’
중간에 VTIC 놈이 자화자찬 대본에 민망해할 뻔한 상황도 커버해 줬으니, 무능력자 낙하산 신인돌 이미지는 안 붙었겠지.
‘기사나 잘 떠라.’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부 첫 무대가 끝나고, 중계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문대 씨!”
갑자기 불쑥 대본에도 없던 뜬금없는 게 튀어나왔다.
VTIC 채율이 불붙은 폭죽이 꽂힌 대형 컵케이크 하나를 내 눈앞에 들이댄 것이다.
“…??”
뭐야 이게.
“문대 씨가 며칠 전에 생일이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생일 축하합니다. 문대 씨.”
그리고 제작진이 카메라 밑에서 강아지 귀가 달린 고깔모자를 쓱 올린다.
“…….”
나는 황망하게 그것을 받아 썼다.
아니, 좀 사전에 말을 해달란 말이다, 방송국 놈들아. 생방송에 이게 무슨….
-스마일!
스케치북에 그런 건 적을 필요 없다. 안 그래도 입꼬리 찢어지게 웃고 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초 불어주세요!
가지가지 한다.
나는 활짝 웃으며 폭죽을 불어 껐다. 그리고 강아지 귀를 당겼다.
정장 입고 연말 프로그램 MC를 보면서 대국민 재롱을 떨게 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수석에서 포복절도하는 놈들이 보인다. 숙소 복귀해서 보자.
…잠깐.
‘그러고 보니 2부 오프닝 대본이….’
“다음 무대는 아름다운 생일에 관련된 곡인데요!”
“올해 여름을 빛낸 곡이죠?”
나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17년 차 밴드 그레이케이블의 ‘birthday boy’. 특별한 라이브 공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걸 위한 연출이었냐.
다음 곡 소개를 위해 존엄성이 사라지는 게 아이돌 MC냐고.
무슨 정규 음방도 아니고 연말 프로그램까지 계속되는 아이돌의 본분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이 기조는 엔딩까지 간다.
* * *
‘박문대 귀여워!!’
중계석 아래에서 카메라를 잡고 있던 박문대의 홈마는 기쁨으로 왈칵 울 뻔했다.
관계자에게서 문대가 연말에 MC를 본다는 소문 하나 듣고 이 근처를 잡은 보람이 넘쳤다!
‘이거지! 이거야!’
정말 오랜만에, 실물로 보는 박문대가 너무 좋았다….
박문대는 남색의 깔끔한 정장 아래 검은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는데, 잘 넘긴 머리와 어울리는 MC다운 차림이었다.
하지만 MC 중 막내랍시고 하얀 리본 타이를 했는데 그게 정말… 너무 귀여웠다!
특히 컵케이크를 받아 들 때!
깜짝 순서였는지, 박문대는 당황한 티가 역력해서 더 귀여웠다.
‘코에 크림 묻었어….’
확인하자마자 박문대가 닦아낸 뒤 관계자들이 정리까지 해줘 버렸지만, 홈마는 이미 그 컷을 잡았다.
‘하하하…! 하하하!’
오랜만에 온 오프라인 촬영에 완전히 들뜬 홈마는 내적 광소를 터뜨리며 미친 듯이 사진을 수집했다. 프리뷰는 너구나!
사고 이후, 극도의 우울한 시간과 롤러코스터처럼 미친 듯이 널뛰는 상황, 그리고 걱정 가득한 직후 활동 분위기를 경험하며 쌓인 피로가 날아갔다.
속이 후련하고 즐거웠다.
‘이번 활동 진짜 기대된다.’
제자리에 무사히 돌아온 느낌이 정말 좋았다. 홈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마스크를 고쳐 썼다.
‘문대 컨디션도 좋아 보이고!’
가끔 멤버들이 가수석에서 박문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면, 카메라 불이 안 들어왔을 때는 슬쩍 마주 흔들어주는 모습이 좋았다.
게다가 박문대는 그 와중에 팬들의 카메라 렌즈까지 찾아낸 게 분명했다. 이 카메라에도 아이컨택을 했단 말이다!
‘평생 아이돌 하자….’
박문대야말로 그녀의 케이팝 인생에 내려온 정착지가 분명했다. 아무튼 그랬다.
‘환승? 그런 건 없다.’
전 아이돌의 사회면 진출을 보며, 다시는 아이돌을 믿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홈마의 쓰디쓴 음주 기억은 일련의 미친 사건들을 거치며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3부.
‘얘들 곧 하나 보다! 큐시트 맞았네.’
박문대가 성큼성큼 뛰어서 MC석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수석에서도 테스타가 이동하는 모습도 확인했다.
‘연말 프로그램은 공식 직캠을 잘 안 주니까…!’
홈마는 사명감을 가지고 카메라를 꾹 쥐었다.
더없이 뿌듯한 시간이었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귀갓길. 그녀는 흡족하게 SBC 상암홀을 빠져나오게 된다.
피로가 안 쌓였다. 아니, 지금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폭주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집에 돌아가면 피곤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박문대의 홈마는 너무 행복했다.
“진짜 무대 너무 잘해.”
테스타는 전혀 기량이 줄지 않았다.
심지어 단 하나의 안무도 난이도를 조정하거나 삭제한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숙련도가 붙은 느낌이었어!’
교통사고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퇴원 직후, 단체 콘서트에서 잠깐 비틀거렸던 박문대도 오늘은 팔팔 날아다녔다.
완전히 무장이 완료되어 호승심으로 활활 불타는 것이 현장에서도, 카메라 렌즈 너머로도 느껴졌다.
물론 무대 자체의 구성도 좋았다. ‘Spring out’에서 사격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한 것은 화려하고, 연말에 맞게 웅장했다.
분명히 인터넷에서 제법 화제가 되었으리라 홈마는 짐작했다.
‘자… 이 부분만!’
그녀는 신나게 택시에 타서, 노트북에 카메라 용량을 연결해 촬영한 동영상을 조금 확인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을 꼭 다시 곱씹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영상을 배속으로 돌리던 때였다.
‘어?’
무대를 마치고 막 MC석으로 올라가는 박문대.
그 박문대의 검은 머리 아래로… 밝은 가닥이 보였다.
전율이 흘렀다.
“가발…!”
검은 머리는 스프레이든 가발이든, 아무튼 그건 가짜던 것이다.
박문대는… 또 흑발을 탈출했다!
‘미친! 이번 앨범 염색모야!’
이건 그녀가 흑발 박문대를 선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무슨 색이지? 무슨 색이야? 조명 보정하면 색 좀 나오겠지?’
홈마는 이렇게 설레고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이 너무 간만인 탓이었다.
“하….”
홈마는 1월까지 자신이 스포일러를 참을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며, 활동에 관련된 즐거운 가설들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캡처가 끝난 동영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큐시트를 점검하며 성공적으로 MC석에 복귀한 박문대.
그런데 다시 보니 그 모습이… 좀 이상했다.
“어어.”
그녀는 순간, 하던 상상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홈마는 당장 박문대의 상반신을 확대했다.
“…….”
각도 상 가수석으로 돌아가는 테스타를 보는 것 같았는데, 그 표정이 잠깐… 살벌하다?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지?’
홈마는 싸한 느낌에 몇 번 더 돌려봤지만, 박문대만 찍고 있던 덕에 박문대가 정확히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워낙 표정 관리가 빨리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으음.”
‘착각이겠지.’
겨우 몇 초 지나간 표정으로 이러는 것도 병이었다. 홈마는 애써 으쓱하며, 동영상을 넘겼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문대 MC 정말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형, 강아지 귀 생일선물… 아우!”
“그만해라.”
길고 긴 생방송이 끝났다.
합류하자마자 차로 이동했다. 바로 연습실로 가서 한두 시간 더 맞춰보고 들어갈 예정이었으니까.
‘MC는 괜찮았어.’
무대도 준비한 만큼은 퀄리티가 나왔으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없다.
예상 못 했던 하나를 제외하면.
“모, 목 괜찮아?”
“…멀쩡해.”
“다행이다…!”
이놈 말이다. 선아현.
아까 무대 끝내고 복귀할 때 가수석을 봤는데, 분명 몇 놈들이 과하게 선아현에게 인사했단 말이지.
‘콜라보 무대 준비하는 놈들 같은데.’
거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그 후에 선아현이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눅 든 것처럼.
“…….”
찝찝한데.
나는 연습실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 놈 중 하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야.”
“어어? 문대 왜?”
큰세진이다.
이놈이 아까 입장할 때 선아현에게 인사하던 놈들을 은근슬쩍 끊는 걸 봤다.
‘이놈도 눈치챈 것 같은데.’
나는 목소리를 좀 낮춰서, 앞에서 걷는 놈들에게 들릴 여지를 차단했다.
그리고 바로 본론을 때렸다.
“너 가수석에서… 봤지. 선아현.”
“…음.”
큰세진은 무슨 말인지 즉시 이해한 것 같았다.
“그거.”
“그래, 뭐 본 거 있나? 콜라보하는 놈들로 보이던데.”
놈은 어깨를 으쓱했다.
“뻔하지 뭐. 아현이 박박 긁었겠지.”
“…!”
“아현이 애가 착하잖아. 막 이렇게~ 요령 좋은 타입이 아니니까 눌러보려는 거지.”
큰세진이 눈썹을 올렸다.
“그런 거 있잖아. ‘야~ 아현 씨는 카메라 되게 많이 받으시네. 부럽다~ 막, 연습 많이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하면서 좀 쪼개주고~”
“…….”
어찌나 잘 깐족거리는지 주둥이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지경이다.
그러나 큰세진의 말투는 금방 진지해졌다.
“거기다 친한 척해보려는 사람도 한둘이었겠어? 아현이 낯가리니까 또 그걸로 급 나눠서 사람 차별한다고 뒷담하고~ 그랬겠지 뭐.”
“……후.”
“이해 가지?”
“그래.”
서열질 한번 X 같이 하네. 나이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이 새끼들이 때랑 다를 게 없다.
‘잘나가니까 벌벌 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잘나가는 놈이 만만해 보이면 더 지랄한다는 인간 본성을 깜박했다.
게다가 그룹에 이름값 좀 있는 놈들만 모아둬서 더 이겨 먹으려고 드는 것 같았다.
‘이건 이야기 좀 들어봐야겠는데.’
나는 연습실에 들어가기 전에 선아현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발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
저지당했다.
고개를 돌리니. 내 어깨를 잡은 큰세진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차차, 박문대, 설마 아현이한테 이런 거 떠들 건 아니지? 안 된다~”
“왜.”
“야,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큰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라면 동갑 친구가 이 상황을 알아차리는 걸 참을 수 있겠냐? 친하니까 더 싫지 않겠어?”
“…!”
“아현이가 알아서 하게 둬. 그게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