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Mắt Hay Ra Đi Raw - C146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6화
“자, 활짝~”
셔터 소리가 울렸다. 풀장 위에 앉아 있던 테스타가 어깨동무를 한 채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물론 나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잘 나오네.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까지 온 김에 썸머 패키지(Summer package)를 촬영 중이다. 화보와 간단한 리얼리티 영상 컨텐츠를 함께 묶어 내는 그거 말이다.
그리고 이 영상 컨텐츠에서 ‘평소 그다지 보지 못했던 조합을 찍자’는 제작진의 요청 아래, 룸메이트가 배정되었다.
그래서 박문대와 류청우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 마침 말까지 거는군.
“문대야, 수건.”
“…예.”
수건을 낚아채서 목을 닦아냈다. 속이 울렁거렸다.
‘후.’
최대한 자제는 하는데, 이게 카메라에 잡힐지 안 잡힐지 모르겠다.
‘…망할.’
나도 안다.
류청우 잘못은 없지.
근데 X발 생각나는 걸 어쩌라는 말인가. 저걸 볼 때마다…… 떠오른다고.
덕분에 룸메이트 컨텐츠는 완전 초토화 수준이다. 방에선 대화도 제대로 안 하니까.
이게 내 한계였다.
모로 가든 불화설만 안 떴으면 좋겠는데. 일단…… 일단, 한국 돌아가서 좀 떨어지면, 나아지겠지.
‘……미치겠다.’
나는 쉬는 시간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는 룸메이트끼리 무슨 워터 슬라이드까지 타게 만들 것 같으니, 그동안이라도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다.
근데 또 꼬리가 붙었다.
“저, 저기….”
“왜.”
“이, 이거.”
따라온 선아현이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음료가 들어 있었다.
자기 손에도 한 잔 들려 있는 걸 보니 스탭이 나눠준 모양이었다.
“…….”
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안 받으면 계속 말을 걸 테니까.
선아현은 음료를 준 후에도 떠나지 않고 애매한 거리에 앉았다.
하지만 말을 거는 대신, 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음료를 홀짝거렸다.
조용했다.
“…….”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는 대충 화단에 걸터앉은 그대로, 뜨거운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댔다.
‘핫초코였네.’
더럽게 달았다.
* * *
무슨 상어 수족관을 가로지르는 워터 슬라이드를 타고 나니, 모여서 문답을 주고받는 컨텐츠가 진행되었다.
참을 만했다.
“좋아요~ 그럼 질문을 뽑아보겠습니다!”
큰세진이 웃으며 통에서 질문을 뽑았다.
“음, ‘최근 가장 많이 친해진 멤버’라, 이거 저는 몇 표 못 받겠네요. 저는! 원래 친한 멤버니까~”
빨리 끝내자.
“저는 이세진이요.”
“헉! 문대 최근에 나한테 많이 의지하는구나? 정말 감동적이야! 저도 문대 뽑겠습니다~”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큰세진이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자, 그럼 우리 유진이는?”
“배세진 형이요! 저는 룸메이트 좋아요.”
바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적당히 웃기게 대답했으니 이상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하하, 또 나야?”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또 한참 계속되었다.
몇 번의 질문이 지나가고…, 슬슬 끝날 무렵.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마지막 질문 카드입니다. ‘힘들었지만 극복해 냈던 인생 경험은?’입니다. 흠, 많은 사례가 떠오를 수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아~ 마지막치고는 좀 우울한가? 하나 더 뽑을 기회, 어떠세요?”
“…? 저는 뜻깊고 좋은 것 같습니다!”
김래빈의 대답과 함께 문답이 돌아갔다.
…류청우부터.
“음, 극복 경험. 사실 제가 양궁을 그만두게 된 게… 자의는 아니었어요. 어릴 때 가족 여행 중에 교통사고가 났었다는데,”
그만.
“그때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촬영 중이다. 다른 생각을 하자.
“하지만 여러분을 만나서 이렇게 데뷔하고 활동할 수 있어서, 지금은 그냥 인생의 변환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고맙다 얘들아. 감사합니다, 러뷰어!”
“좋아요!”
“…이런 이야기 해도 괜찮겠어?”
“하하, 이런 이야긴 카메라 앞에서 처음 해보는 것 같은데, 팬분들이 보실 거니까 한번 해봤어.”
“오, 청우 형 경험이 너무 세다~ 우리 그냥 승복하고 새 걸 하나 뽑죠? 유진이도 하나 뽑아봐야 하니까!”
“저 뽑아요!”
토할 것 같다.
“…박문대!”
“잠깐. 화장실.”
나는 소파에서 벗어나서 조명이 가득한 방을 나갔다. 연결된 어두운 복도를 달려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허억.”
다행히 목구멍에 올라오는 건 없었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행위에 집중하면 그만 생각할 수 있…….
“닥쳐.”
나는 세면대에 물을 틀고, 머리를 박았다.
찬물이 편했다.
“…문대야!”
“문대 씨, 괜찮아요?”
“형!”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체 제작 컨텐츠라 다행이었다. 일반 방송이었으면 수습이 안 된다.
‘나가야지.’
하지만 머리를 못 떼겠다. 좀 더 있다가… 조금만 더….
“그만.”
나는 물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기를 대충 닦아낸 뒤에, 화장실 문을 열었다.
스탭과 멤버 몇 명이 문밖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좀, 속이 안 좋아서.”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지금 촬영 가능해요?”
“……예.”
큰세진이 끼어들었다.
“박문대. 여기 촬영 좀 미뤄도 괜찮대. 좀 쉬어야겠으면…….”
“어차피 똑같아. 그냥 해.”
나는 남은 물기를 털어낸 뒤에, 촬영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또 봐요 러뷰어~”
하지만 깨달았다.
이러다 X발 큰일 나겠다는 것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본격적인 촬영들은 다 마무리된 저녁.
나는 류청우가 있을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 뒤편 정원으로 가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내 상태는 대놓고 PTSD다. 더 논할 여지도 없다.
문제는 이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이 지경이 되니 과연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슬슬 회의감이 든다는 점이다.
‘…답이 없군.’
혹시 내 회복에 두세 달 이상 걸렸다간 차후 테스타 활동에 문제가 생길 지경이다.
그럼 정말 상태이상으로 죽어도 재시작이 가능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다 끝장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더 문제지.’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이이잉-
그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꺼내서 확인하니, 예상 못 한 이름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VTIC 청려 선배님]
청려였다.
“……후.”
평소라면 그냥 안 받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좀 받아봐야겠다.
이 X 같은 상태이상 보상을 받은 적 있는지 안 물어볼 수가 없군.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약간 의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흠, 바로 받을 줄은 몰랐는데.
“예. 그렇군요. 용건은?”
-오랜만에 연락한 건데 너무 그러지 말고… 잘 지내요?
“용건 없으시면 제 용건부터 말합니다.”
-하하, 그래요.
“혹시 무슨 환영 같은 거 본 적 없습니까?”
-…환영?
“미션 하면서요.”
-…….
전화 너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곧 대답이 들렸다.
-아, 무슨 문제 생겼구나.
“…!”
-성적? 회사? 아니지, 그런 건 아닐 테고… 좀 더 제어할 수 없는 요소인가. 그럼 인간관계?
“…….”
-인간관계구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 같은데, 음…… 내가 말하면 더 스트레스받는다고 하니, 조언하기도 그렇고요.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환영을 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일단 이 새끼는 상태이상 보상은 받은 적이 없는 상태고.
조언이라.
“하세요.”
-그래요?
어, 그래. 어차피 지금은 이놈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생각 안 들 것 같다.
재시작 관련해서 떠들게 놔둬 보자.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
-어차피 처음으로 돌아가면, 지금 하는 감정 소모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 그냥… 다음에는 제외하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해요.
“…….”
-어차피 없어지거든요.
…없어진다고.
나는 처음으로, 뚜렷하게 가정해 보았다.
진짜 돌아갈 수 있다고 치자.
나도 실패하면 20살 박문대 생일날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지금까지의 22살 박문대는 전부 없던 일이 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보는 것이다.
한 번 해봤으니 확실히 편하겠지. 로또 번호라도 하나 들고 가면 처음부터 보안 괜찮은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더 잘할 수 있었다. 이미 다 아니까.
첫 촬영부터 데뷔 후까지 터졌던 온갖 피곤하고 민망한 일들은 미리 피하면서, 더 괜찮은 인원으로 그룹이 만들어지도록…….
‘아냐.’
…그러고 싶진 않았다.
웃기지만, 그렇게 해서 상태이상을 다 극복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마음에 들 것 같지가 않았다.
그 고생과 귀찮음이, 이 나이 어린 코찔찔이들과 함께 만든 모든 것들이… 어느새 내 성취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만든다고 해도, 절대 지금과 같은 의미일 수가 없었다.
물론 당장은 상황이 좀 거지 같았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지금을 포기하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머리가 좀 깨끗해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더 잘 해봐야겠군요.”
-……그건.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후회할 텐데.
“뭐, 하겠죠. 누가 뭘 한들 안 하겠습니까.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새끼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놀랍게도, 집 나갔던 이성이 청려와의 통화로 돌아온 것 같다.
그럼 객관적으로 현 상황에서 제일 좋은 선택을 찾아보자.
일단 이대로는 회복 기미가 안 보이면…… 답은 하나뿐이지.
‘건강 문제로 활동 중단.’
경험상 약 먹으면서 한 달쯤 혼자 은둔 생활을 하면 좀 괜찮아질 것이다. 불화설보단 이쪽이 낫다.
회사에서 거절하면, 뭐… 불화설을 감수하는 수밖에는 없다.
다른 놈들한테 대충 류청우 얼굴을 보면 사이코패스가 될 것 같다고 설명하면 박문대와 류청우의 접점을 최대한 없애줄 것이다.
서로 불편하겠지만, 요양하겠다는 놈 잡은 회사 탓이니 회사에 항의하라고 말해둬야겠다.
그래도 최대한 피해가 없는 쪽으로 하고 싶으니, 웬만해서는 활동 중단을 회사 측에서 받아줬으면 좋겠다.
‘이 정도인가.’
나는 정원을 벗어나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진정됐으니, 그놈과 인사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썸머 패키지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틴다.’
다른 수가 없고, 어차피 내일 떠날 때 엔딩 컷만 따면 끝이니까.
참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상도 못 한 광경이 보였다.
“…왔어?”
류청우가 탁자에 넘치도록 술병을 올려둔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문밖으로 나간 뒤, 도로 문을 닫…….
“카메라 다 수거해갔어. 마셔도 돼.”
“…….”
그 순간, 나는 내가 술을 간절히 마시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이 상황에서 술을 마셔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긴 한다. 근데…….
“자.”
나는 손을 뻗어 술병을 받았다. 그리고 위를 땄다.
그대로 입에 꽂았다.
그때야 내 주둥이가 벌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빨이 딱딱 병 입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나는 몸을 돌려 선 채로, 계속 술을 목에 들이부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너 나한테 뭐 참고 있지.”
“…….”
“참다가 터뜨렸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까 봐 그냥 참는 거야. 맞지?”
탄산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말해. 난 이런 걸로 상처 잘 안 받으니까.”
그러니까 X발 내가 말해도 넌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이건…, 이건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 새끼 잘못은 전혀 없다.
애초에 내가 이놈 이름도 몰랐던 걸 보니, 안면도 별로 없는 먼 친척이다. 풍산 류씨들이 워낙 같이 뭘 많이 해서 얼결에 같이 갔겠지.
‘그리고 애가 그렇게 큰 사고 났으니 저놈 부모님도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거고. 그러니까, 장례식에서도, 못 봤…….’
나는 다시 술을 목에 꽂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X발.
새 병을 집어 들었다. 다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럼 네가 용납 가능한 선에서만 말해봐.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
”회사니 병원이니 하는 소리도 안 할 거야.”
그 순간, 생각도 안 해본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부러워서.”
“응?”
“부럽다고.”
그리고 말하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난 이 새끼가 부러웠던 것이다.
내가 류청우처럼 그날 여행에 따라가서 다쳤다면, 그래서 부모님이 날 따라 앰뷸런스에 타느라 그 망할 펜션에 안 갔으면 하고.
단순히 그 사고가 연상돼서가 아니라, 이 새끼가 얄미웠다.
인생 최대의 행운을 시련으로 이야기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부모님 멀쩡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서… 부럽다.”
“…!”
나는 다 마신 술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딴 미친 소리를 지껄였는데……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류청우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술병을 하나 더 건넸다.
“그때 자다가 기억났어?”
“뭐?”
“래빈이한테 들었어. 네가 자다가 예전 기억 떠올리는 것 같다고.”
“…….”
“내가 교통사고 후유증 이야기 꺼낸 게… 배부른 소리 같았겠구나.”
…아무래도 ‘박문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은 놈 앞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징징댄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비슷, 하긴 했다.
“미안하다, 그런 말 해서.”
“사과할 건 아니잖아.”
“그래도 사과 들으니까 기분 좀 괜찮잖아. 봐라, 너랑 오랜만에 대화하네.”
“…….”
“문대야. 좀… 편하게 이런 이야기 해도 괜찮아.”
류청우가 술병을 하나 더 땄다.
“사람이, 공포와 고통 앞에서… 원래 좀 화내고 남 탓도 하고, 그래도 괜찮거든.”
“…….”
“나는 겨우 양궁 그만둘 때도 그랬어. 아마 그런 진상이 없었을 거야.”
류청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근데 넌 못 그러는 것 같다.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좀 해놔. 사람이 어떻게 매번 합리적으로 살겠어.”
“…….”
나는, 병을 내려놓았다.
손이 좀 떨렸다.
“…안 힘들게 살고 싶었는데.”
그럭저럭 괜찮게 지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여기저기서 지원도 받았고, 손재주가 좋아서 생활비도 어떻게든 구해왔고.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수 없으니 참은 거지, 참 싫었나 보다.
“근데 그렇게 못 살아서 X 같다.”
“……그래.”
“좀, 버겁고.”
새 술을 뜯었다.
이런 걸 말하고 나면 당연히 찝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술이 들어가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그랬다.
나는 천천히 목을 축였다.
취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 후로도 맥락 없이, 단어나 문장만 늘어놓은 것 같다.
류청우는 특별히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가끔 반응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서야 말을 꺼냈다.
“병원 이야기 안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한국 돌아가면 상담은 받는 게 낫겠어. 아현이랑 같이.”
“…….”
“정신이 이상해 보여서가 아니라, 힘들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그래.”
“돈도 많이 받았는데, 널 위해서 좀 써.”
“그래.”
나는 술을 삼켰다.
“근데 아직도 너 보기 힘든데.”
류청우는 잠깐 얼빠진 얼굴이더니, 곧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 천천히 가자. 우리가 한두 달 얼굴 볼 것도 아닌데, 좀 거리 두고 시간 보내도 괜찮겠지.”
“……그래.”
맞는 말이었다.
“근데 문대야. 존댓말은 좀 써라. 너 갑자기 반말이다?”
“……!”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요청대로 존댓말을 회복한 채로, 술을 계속 마셨다.
대화 화제는 약간 비껴갔고 마주 앉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거북하지는 않았다.
그 술병들이 모두 룸서비스라 미친 가격이 청구되었다는 것을 다음 날 알았으나, 그다지 아깝진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다행히 일정 중간중간 혼자 시간을 보낼 만한 새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 오느라 미뤄뒀던 개인 출연이었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146화
“자, 활짝~”
셔터 소리가 울렸다. 풀장 위에 앉아 있던 테스타가 어깨동무를 한 채 카메라를 향해 웃었다.
물론 나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사진 잘 나오네. 고생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까지 온 김에 썸머 패키지(Summer package)를 촬영 중이다. 화보와 간단한 리얼리티 영상 컨텐츠를 함께 묶어 내는 그거 말이다.
그리고 이 영상 컨텐츠에서 ‘평소 그다지 보지 못했던 조합을 찍자’는 제작진의 요청 아래, 룸메이트가 배정되었다.
그래서 박문대와 류청우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 마침 말까지 거는군.
“문대야, 수건.”
“…예.”
수건을 낚아채서 목을 닦아냈다. 속이 울렁거렸다.
‘후.’
최대한 자제는 하는데, 이게 카메라에 잡힐지 안 잡힐지 모르겠다.
‘…망할.’
나도 안다.
류청우 잘못은 없지.
근데 X발 생각나는 걸 어쩌라는 말인가. 저걸 볼 때마다…… 떠오른다고.
덕분에 룸메이트 컨텐츠는 완전 초토화 수준이다. 방에선 대화도 제대로 안 하니까.
이게 내 한계였다.
모로 가든 불화설만 안 떴으면 좋겠는데. 일단…… 일단, 한국 돌아가서 좀 떨어지면, 나아지겠지.
‘……미치겠다.’
나는 쉬는 시간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는 룸메이트끼리 무슨 워터 슬라이드까지 타게 만들 것 같으니, 그동안이라도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다.
근데 또 꼬리가 붙었다.
“저, 저기….”
“왜.”
“이, 이거.”
따라온 선아현이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음료가 들어 있었다.
자기 손에도 한 잔 들려 있는 걸 보니 스탭이 나눠준 모양이었다.
“…….”
나는 잔을 받아들었다. 안 받으면 계속 말을 걸 테니까.
선아현은 음료를 준 후에도 떠나지 않고 애매한 거리에 앉았다.
하지만 말을 거는 대신, 슬쩍 내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음료를 홀짝거렸다.
조용했다.
“…….”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는 대충 화단에 걸터앉은 그대로, 뜨거운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댔다.
‘핫초코였네.’
더럽게 달았다.
* * *
무슨 상어 수족관을 가로지르는 워터 슬라이드를 타고 나니, 모여서 문답을 주고받는 컨텐츠가 진행되었다.
참을 만했다.
“좋아요~ 그럼 질문을 뽑아보겠습니다!”
큰세진이 웃으며 통에서 질문을 뽑았다.
“음, ‘최근 가장 많이 친해진 멤버’라, 이거 저는 몇 표 못 받겠네요. 저는! 원래 친한 멤버니까~”
빨리 끝내자.
“저는 이세진이요.”
“헉! 문대 최근에 나한테 많이 의지하는구나? 정말 감동적이야! 저도 문대 뽑겠습니다~”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큰세진이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자, 그럼 우리 유진이는?”
“배세진 형이요! 저는 룸메이트 좋아요.”
바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적당히 웃기게 대답했으니 이상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하하, 또 나야?”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또 한참 계속되었다.
몇 번의 질문이 지나가고…, 슬슬 끝날 무렵.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마지막 질문 카드입니다. ‘힘들었지만 극복해 냈던 인생 경험은?’입니다. 흠, 많은 사례가 떠오를 수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아~ 마지막치고는 좀 우울한가? 하나 더 뽑을 기회, 어떠세요?”
“…? 저는 뜻깊고 좋은 것 같습니다!”
김래빈의 대답과 함께 문답이 돌아갔다.
…류청우부터.
“음, 극복 경험. 사실 제가 양궁을 그만두게 된 게… 자의는 아니었어요. 어릴 때 가족 여행 중에 교통사고가 났었다는데,”
그만.
“그때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촬영 중이다. 다른 생각을 하자.
“하지만 여러분을 만나서 이렇게 데뷔하고 활동할 수 있어서, 지금은 그냥 인생의 변환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고맙다 얘들아. 감사합니다, 러뷰어!”
“좋아요!”
“…이런 이야기 해도 괜찮겠어?”
“하하, 이런 이야긴 카메라 앞에서 처음 해보는 것 같은데, 팬분들이 보실 거니까 한번 해봤어.”
“오, 청우 형 경험이 너무 세다~ 우리 그냥 승복하고 새 걸 하나 뽑죠? 유진이도 하나 뽑아봐야 하니까!”
“저 뽑아요!”
토할 것 같다.
“…박문대!”
“잠깐. 화장실.”
나는 소파에서 벗어나서 조명이 가득한 방을 나갔다. 연결된 어두운 복도를 달려서 화장실에 들어갔다.
“허억.”
다행히 목구멍에 올라오는 건 없었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행위에 집중하면 그만 생각할 수 있…….
“닥쳐.”
나는 세면대에 물을 틀고, 머리를 박았다.
찬물이 편했다.
“…문대야!”
“문대 씨, 괜찮아요?”
“형!”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체 제작 컨텐츠라 다행이었다. 일반 방송이었으면 수습이 안 된다.
‘나가야지.’
하지만 머리를 못 떼겠다. 좀 더 있다가… 조금만 더….
“그만.”
나는 물에서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기를 대충 닦아낸 뒤에, 화장실 문을 열었다.
스탭과 멤버 몇 명이 문밖에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좀, 속이 안 좋아서.”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지금 촬영 가능해요?”
“……예.”
큰세진이 끼어들었다.
“박문대. 여기 촬영 좀 미뤄도 괜찮대. 좀 쉬어야겠으면…….”
“어차피 똑같아. 그냥 해.”
나는 남은 물기를 털어낸 뒤에, 촬영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또 봐요 러뷰어~”
하지만 깨달았다.
이러다 X발 큰일 나겠다는 것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본격적인 촬영들은 다 마무리된 저녁.
나는 류청우가 있을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호텔 뒤편 정원으로 가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내 상태는 대놓고 PTSD다. 더 논할 여지도 없다.
문제는 이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이 지경이 되니 과연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슬슬 회의감이 든다는 점이다.
‘…답이 없군.’
혹시 내 회복에 두세 달 이상 걸렸다간 차후 테스타 활동에 문제가 생길 지경이다.
그럼 정말 상태이상으로 죽어도 재시작이 가능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다 끝장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더 문제지.’
정신머리가 어떻게 된 건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이이잉-
그 순간,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꺼내서 확인하니, 예상 못 한 이름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청려였다.
“……후.”
평소라면 그냥 안 받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좀 받아봐야겠다.
이 X 같은 상태이상 보상을 받은 적 있는지 안 물어볼 수가 없군.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약간 의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흠, 바로 받을 줄은 몰랐는데.
“예. 그렇군요. 용건은?”
-오랜만에 연락한 건데 너무 그러지 말고… 잘 지내요?
“용건 없으시면 제 용건부터 말합니다.”
-하하, 그래요.
“혹시 무슨 환영 같은 거 본 적 없습니까?”
-…환영?
“미션 하면서요.”
-…….
전화 너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곧 대답이 들렸다.
-아, 무슨 문제 생겼구나.
“…!”
-성적? 회사? 아니지, 그런 건 아닐 테고… 좀 더 제어할 수 없는 요소인가. 그럼 인간관계?
“…….”
-인간관계구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 같은데, 음…… 내가 말하면 더 스트레스받는다고 하니, 조언하기도 그렇고요.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환영을 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일단 이 새끼는 상태이상 보상은 받은 적이 없는 상태고.
조언이라.
“하세요.”
-그래요?
어, 그래. 어차피 지금은 이놈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 생각 안 들 것 같다.
재시작 관련해서 떠들게 놔둬 보자.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
-어차피 처음으로 돌아가면, 지금 하는 감정 소모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 그냥… 다음에는 제외하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해요.
“…….”
-어차피 없어지거든요.
…없어진다고.
나는 처음으로, 뚜렷하게 가정해 보았다.
진짜 돌아갈 수 있다고 치자.
나도 실패하면 20살 박문대 생일날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지금까지의 22살 박문대는 전부 없던 일이 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보는 것이다.
한 번 해봤으니 확실히 편하겠지. 로또 번호라도 하나 들고 가면 처음부터 보안 괜찮은 곳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더 잘할 수 있었다. 이미 다 아니까.
첫 촬영부터 데뷔 후까지 터졌던 온갖 피곤하고 민망한 일들은 미리 피하면서, 더 괜찮은 인원으로 그룹이 만들어지도록…….
‘아냐.’
…그러고 싶진 않았다.
웃기지만, 그렇게 해서 상태이상을 다 극복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마음에 들 것 같지가 않았다.
그 고생과 귀찮음이, 이 나이 어린 코찔찔이들과 함께 만든 모든 것들이… 어느새 내 성취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만든다고 해도, 절대 지금과 같은 의미일 수가 없었다.
물론 당장은 상황이 좀 거지 같았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지금을 포기하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머리가 좀 깨끗해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더 잘 해봐야겠군요.”
-……그건.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후회할 텐데.
“뭐, 하겠죠. 누가 뭘 한들 안 하겠습니까.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새끼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놀랍게도, 집 나갔던 이성이 청려와의 통화로 돌아온 것 같다.
그럼 객관적으로 현 상황에서 제일 좋은 선택을 찾아보자.
일단 이대로는 회복 기미가 안 보이면…… 답은 하나뿐이지.
‘건강 문제로 활동 중단.’
경험상 약 먹으면서 한 달쯤 혼자 은둔 생활을 하면 좀 괜찮아질 것이다. 불화설보단 이쪽이 낫다.
회사에서 거절하면, 뭐… 불화설을 감수하는 수밖에는 없다.
다른 놈들한테 대충 류청우 얼굴을 보면 사이코패스가 될 것 같다고 설명하면 박문대와 류청우의 접점을 최대한 없애줄 것이다.
서로 불편하겠지만, 요양하겠다는 놈 잡은 회사 탓이니 회사에 항의하라고 말해둬야겠다.
그래도 최대한 피해가 없는 쪽으로 하고 싶으니, 웬만해서는 활동 중단을 회사 측에서 받아줬으면 좋겠다.
‘이 정도인가.’
나는 정원을 벗어나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진정됐으니, 그놈과 인사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썸머 패키지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틴다.’
다른 수가 없고, 어차피 내일 떠날 때 엔딩 컷만 따면 끝이니까.
참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상도 못 한 광경이 보였다.
“…왔어?”
류청우가 탁자에 넘치도록 술병을 올려둔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문밖으로 나간 뒤, 도로 문을 닫…….
“카메라 다 수거해갔어. 마셔도 돼.”
“…….”
그 순간, 나는 내가 술을 간절히 마시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이 상황에서 술을 마셔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긴 한다. 근데…….
“자.”
나는 손을 뻗어 술병을 받았다. 그리고 위를 땄다.
그대로 입에 꽂았다.
그때야 내 주둥이가 벌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빨이 딱딱 병 입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
나는 몸을 돌려 선 채로, 계속 술을 목에 들이부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너 나한테 뭐 참고 있지.”
“…….”
“참다가 터뜨렸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까 봐 그냥 참는 거야. 맞지?”
탄산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말해. 난 이런 걸로 상처 잘 안 받으니까.”
그러니까 X발 내가 말해도 넌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이건…, 이건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이 새끼 잘못은 전혀 없다.
애초에 내가 이놈 이름도 몰랐던 걸 보니, 안면도 별로 없는 먼 친척이다. 풍산 류씨들이 워낙 같이 뭘 많이 해서 얼결에 같이 갔겠지.
‘그리고 애가 그렇게 큰 사고 났으니 저놈 부모님도 다른 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거고. 그러니까, 장례식에서도, 못 봤…….’
나는 다시 술을 목에 꽂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X발.
새 병을 집어 들었다. 다시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그럼 네가 용납 가능한 선에서만 말해봐.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
”회사니 병원이니 하는 소리도 안 할 거야.”
그 순간, 생각도 안 해본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부러워서.”
“응?”
“부럽다고.”
그리고 말하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난 이 새끼가 부러웠던 것이다.
내가 류청우처럼 그날 여행에 따라가서 다쳤다면, 그래서 부모님이 날 따라 앰뷸런스에 타느라 그 망할 펜션에 안 갔으면 하고.
단순히 그 사고가 연상돼서가 아니라, 이 새끼가 얄미웠다.
인생 최대의 행운을 시련으로 이야기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부모님 멀쩡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서… 부럽다.”
“…!”
나는 다 마신 술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딴 미친 소리를 지껄였는데……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류청우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술병을 하나 더 건넸다.
“그때 자다가 기억났어?”
“뭐?”
“래빈이한테 들었어. 네가 자다가 예전 기억 떠올리는 것 같다고.”
“…….”
“내가 교통사고 후유증 이야기 꺼낸 게… 배부른 소리 같았겠구나.”
…아무래도 ‘박문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은 놈 앞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징징댄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비슷, 하긴 했다.
“미안하다, 그런 말 해서.”
“사과할 건 아니잖아.”
“그래도 사과 들으니까 기분 좀 괜찮잖아. 봐라, 너랑 오랜만에 대화하네.”
“…….”
“문대야. 좀… 편하게 이런 이야기 해도 괜찮아.”
류청우가 술병을 하나 더 땄다.
“사람이, 공포와 고통 앞에서… 원래 좀 화내고 남 탓도 하고, 그래도 괜찮거든.”
“…….”
“나는 겨우 양궁 그만둘 때도 그랬어. 아마 그런 진상이 없었을 거야.”
류청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근데 넌 못 그러는 것 같다.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좀 해놔. 사람이 어떻게 매번 합리적으로 살겠어.”
“…….”
나는, 병을 내려놓았다.
손이 좀 떨렸다.
“…안 힘들게 살고 싶었는데.”
그럭저럭 괜찮게 지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여기저기서 지원도 받았고, 손재주가 좋아서 생활비도 어떻게든 구해왔고.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별수 없으니 참은 거지, 참 싫었나 보다.
“근데 그렇게 못 살아서 X 같다.”
“……그래.”
“좀, 버겁고.”
새 술을 뜯었다.
이런 걸 말하고 나면 당연히 찝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술이 들어가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그랬다.
나는 천천히 목을 축였다.
취해서 확실하진 않지만, 그 후로도 맥락 없이, 단어나 문장만 늘어놓은 것 같다.
류청우는 특별히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가끔 반응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서야 말을 꺼냈다.
“병원 이야기 안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한국 돌아가면 상담은 받는 게 낫겠어. 아현이랑 같이.”
“…….”
“정신이 이상해 보여서가 아니라, 힘들어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그래.”
“돈도 많이 받았는데, 널 위해서 좀 써.”
“그래.”
나는 술을 삼켰다.
“근데 아직도 너 보기 힘든데.”
류청우는 잠깐 얼빠진 얼굴이더니, 곧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하하, 천천히 가자. 우리가 한두 달 얼굴 볼 것도 아닌데, 좀 거리 두고 시간 보내도 괜찮겠지.”
“……그래.”
맞는 말이었다.
“근데 문대야. 존댓말은 좀 써라. 너 갑자기 반말이다?”
“……!”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요청대로 존댓말을 회복한 채로, 술을 계속 마셨다.
대화 화제는 약간 비껴갔고 마주 앉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거북하지는 않았다.
그 술병들이 모두 룸서비스라 미친 가격이 청구되었다는 것을 다음 날 알았으나, 그다지 아깝진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다행히 일정 중간중간 혼자 시간을 보낼 만한 새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 오느라 미뤄뒀던 개인 출연이었다.